어쩜 이리 똑같을까. 이런 걸 데자뷔(기시감)라고 하는가. 3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정치권력과 자본의 유착 형태는 그 모습 그대로다.

전두환 정권이 1987년 6월항쟁으로 물러나고 열린 1988년 5공 청문회. '청문회 스타'로 떠오른 노무현(통일민주당) 의원은 일해재단에 성금을 기부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매섭게 추궁했다. "시류에 순응한다는 것이 돈 문제 때문이라면 6·29 선언 이전에 왜 바른 말씀을 하지 못했습니까." 정 회장의 답변은 의외로 솔직하다. "대단히 송구스럽지만 우리는 그런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30년이 흘러 열린 최순실 국정 농단 청문회. 전경련 회장인 허창수 GS 그룹 회장은 최순실 일당에게 왜 기부했느냐는 질문에 똑같은 답을 내놨다. "정부의 요청이 있으면 기업이 거절하기 힘든 것이 한국적 현실입니다."

대를 이어 정경유착의 폐습을 끊지 못한 한국 최대 재벌 삼성그룹 이재용 부회장도 항변했다. 청와대와 최순실의 협박을 물리치기 힘들었다고.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 삼성의 매출은 10조 원대에서 30배나 증가해 300조 원을 넘어섰다. 세계 휴대전화와 반도체 시장을 지배하며 '글로벌 스탠더드'를 그렇게 강조했다. 하지만 부패한 정치권력 앞에선 '고양이 앞의 쥐' 신세였다.

결국 '정경유착 근절'이라는 5공 청문회의 교훈은 한낱 신기루였고 정경유착이라는 '악령'은 지난 30년 동안 구천에서 떠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올해는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낸 이른바 '87체제'가 출범한 지 30년이 되는 해다. 부산 출신 박종철 열사가 1987년 1월 14일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 끝에 숨을 거둔 뒤 들불처럼 일어난 6월항쟁으로 우리 국민은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그 이후 우리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까지 총 6명의 직선제 대통령을 선출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들 중 말로가 좋았던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자식들이, 혹은 비선이라고 불리는 지인들이 대통령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탄핵 위기에 처한 박근혜 대통령은 본인 스스로 위기를 불러왔다. 한국 민주주의의 비극이고 87체제의 불행이다.

그럼, 통치권자들의 '체제화된 위기'는 어디에서 나왔나.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마치 자신의 사유물인 양 착각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이는 권력의 사유화를 가능하게 한 제도와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국민이 30년 전 그토록 원해서 쟁취했던 대통령 직선제의 음습한 그늘이 그 배경이 됐다는 것은 기막힌 역설이다.

한국 민주주의 출발을 의미하는 87체제는 권력의 집중화라는 낡은 틀 속에서 운명이 다 됐다. 30년간 이어온 제왕적 대통령제는 최순실이라는 괴물을 탄생시켰고 87체제는 사망선고를 받았다. 정치권은 물론 학계, 국민까지 87체제 이후의 선택지를 놓고 생각이 다를 뿐 87체제의 종언에 대해서는 뜻을 같이한다. 특히 6월항쟁 30년을 맞는 올해 '포스트 87체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수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할 수 있다.

'포스트 87체제'의 논의는 단순히 권력 구조 개편에만 매몰돼선 안 된다. 의원내각제나 이원집정제, 4년 중임제 등 권력 구조 개편은 국민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리그'다. 포스트 87체제 논의 과정에서 관심을 둬야 하는 것은 정치공학적인 것이 아니다. 기본권과 생존권, 발언권, 사회적 권리 강화가 그 핵심이다. 수명을 다한 신자유주의 시대와 승자 독식의 사회 체계 개편, 4차 산업혁명, 재벌 개혁, 지방분권, 통일, 경제 민주화 등 새로운 질서에 대비해 다뤄야 될 것이 수두룩하다. 지난 30년 우리는 생산성을 앞세워 세계 10대 경제 강국이 됐다. 이른바 '빠른 추종자(fast follower)' 전략의 성공이다. 이제 창조성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특히 개헌 논의의 주체는 국민이어야 한다. 87체제는 논의 과정에서 국민이 쏙 빠졌다. 6·29선언 이후 여야는 국회의원 8명으로 '정치회담'을 구성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새 헌법을 만들었다.

87체제는 30년 전 남포동과 서면 아스팔트를 뜨겁게 달궜던 민주주의의 함성이 만들어냈다. 이제 지난겨울 광장을 밝혔던 촛불의 의미를 포스트 87체제 안에 담는 데 고민해야한다. 촛불집회에서 국민은 명령했다. "문제는 정치야"라고.

사회2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