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주말 촛불 시위가 시작된 지 벌써 석 달이 지나고,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어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심판이 시작된 지도 7주가 지났다. 또 특검팀의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박·최와 연루된 각종 비리가 날마다 터져 나오고 있다. 아직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과를 예단하기 이를지 모르나, 대통령 탄핵을 전제로 대선 고지를 향한 정계 인사들의 발걸음도 분주하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유력한 대선 예비후보들과 각 정당이 내놓은 화두가 부패청산과 공정사회의 실현이다. 한마디로 우리 사회의 핵심 과제가 정의를 세우는 일이라는 데 정치권이 공감하고 있다는 말로 들린다.

이러한 반향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정의를 규탄하는 민심에 대한 정치적 응답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2012년 대선 당시의 화두가 경제에 집중되었던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마저 느껴진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도덕적 위기에 빠져 있다는 것이고, 이러한 현실 개혁이 과제가 되고 만 것이다. 언필칭 '헬조선'의 역설이며, 동시에 경제민주화를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현 박근혜 정부가 빚어낸 정치적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수년 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책의 제목이기도 했던 '정의란 무엇인가'를 한번 자문해 본다. 한자로 정의(正義)의 뜻이 그렇고 영어 justice의 축자적 의미가 그렇듯이 정의의 핵심 가치는 '올바름'에 있다. 또 공자가 정치에 대한 질문에 대해 '정(正)'이라는 한마디로 답한 사실로 유추컨대, 정의는 정치가 지양해야 할 최고의 덕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올바름이란 정상의 상황에서만 가능한 것이니 결국 정의란 다름 아닌 정상으로의 회복을 뜻한다고도 할 수 있다. 공자는 그 출발이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르게 하는 데에 있다고 하였다. 대통령이 대통령다워야 하고, 국회의원은 국회의원다워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곧 정치의 제 모습을 잃은 것이다. 이른바 '난세'의 모습이다.

문제는 왜 오늘날 정의가 바로 서지 못하게 된 까닭을 제대로 성찰하고 있느냐다. 말로만 정의를 강조하는 것과 부정의 한 오늘의 현실을 근원적으로 성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대선을 코앞에 둔 정치권의 모습을 보면 저들의 관심은 권력구조의 개편과 연관된 헌법 개정에 집중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권력구조 개편은 정치운영의 효율성을 위해 당연히 숙고해야 할 과제이기는 하나, 그것이 사회적 정의 실현의 종국적이거나 직접적인 해결책일 수는 없다. 실제로 대통령제와 내각제 또는 단임제와 중임제 중 어느 쪽이 정의 실현에 더 적합한 제도인지는 입증된 바 없다.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는 그의 또 다른 저서인 '도덕감정론'에서 정의란 인간사회라는 구조물을 지탱하는 주요 기둥이라고 지적하면서 정의가 무너지면 사회는 곧 붕괴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보이지 않는 손'도 정의가 무너진 비정상의 사회에서는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정의의 문제는 제도 이전의 더 근원적인 해법이 요구되는 사회구조와 결부된 인간의 본성에 관한 것이다. 이미 정의가 무너져가는 상황에서 그 뿌리를 규명하지 못한 채 임시방편적으로 제도 개혁에만 손을 댄다면, 그것은 근원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세월호 사건과 박·최게이트에서 드러난 정경유착은 그 뿌리가 다르지 않다. 부정의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세월호 사건의 진실 규명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일 양국 간에 논란이 되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도 마찬가지다.

박·최게이트로 귀결된 우리 사회의 부정의와 부조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멀리는 일제강점기 이래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의 누적된 결과이며, 가깝게는 해방 이후 독재정권에 의해 왜곡 주조된 반인권적 반민주적 적폐에서 연유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이러한 적폐를 청산할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해방 직후 제1공화국 시기에 친일파 청산 시도, 1960년 4월 혁명 직후 한국전쟁 전후 양민학살에 관한 진상 규명 논의 등이 있었다. 또 1987년 민주화 이후 여러 차례의 과거사 청산 작업이 진행됐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번번이 반대세력의 도전으로 중단되거나 철저하게 이뤄지지 못했다. 누적된 불완전한 과거사 청산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도덕적 위기를 초래하기에 이른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본다.

불의한 세력도 늘 '정의'를 집권 명분으로 내세웠다. 1980년 광주민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들어선 제5공화국의 집권당은 그 이름조차 '민주정의당'이었다. 그러나 제5공화국의 신군부세력은 '정의사회의 실현'을 구호로 내세웠지만, 한 번도 과거사 청산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다. 그들이 내세운 정의란 권력의 그럴듯한 치장막였을 뿐, 과거를 성찰하는 도덕적 잣대가 아니었다. 앞으로 다가올 새 시대의 청사진에 '정의'를 포함하려 한다면 과거사 청산은 불가피한 일이다. 인디언의 속담에 미래는 앞에 있지 않고 뒤에 있다지 않았던가.

동아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