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1. 며칠 전 MBC 드라마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을 보다가 눈에 띄는 장면이 있었다. 길동이와 익화리 패거리들이 재회했을 때 술을 나눠 마시며 힘을 모아 조직을 재건하자는 얘기가 나오는 장면이었다. 길동이를 좋아해서 거기까지 따라온 가령이라는 아가씨가 이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살림을 잘하고 손이 빠른지를 보여주려 안달이 나 있었다. 별것 없는 부엌에서 나물로 안주를 만들고 술을 걸러 내오느라 바빴다. 그런 가령을 보던 길동이가 묻는다. "네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 가령은 속내를 들킨 듯해 좀은 부끄러워하면서 "뭐, 그야 여기 여자가 나 하나뿐이니까"라며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다. 길동이는 그런 가령이를 빤히 보다가 "여자라고 그런 게 어디 있어. 우리 먹을 술은 우리가 걸러 먹는다"며 부엌을 나선다. 남존여비의 조선 시대에 남녀평등을 체화한 홍길동이라니, 무척 신선했다.

사례2. 곧 초등 4학년이 되는 아들이 밥을 먹다가 물을 찾았다. 식탁 바로 옆에 싱크대가 있고 생수병이 뻔히 보이는데도 "엄마 물 주세요" 했다. 평소 같으면 내 밥숟가락을 놓고 얼른 일어나 주었을 텐데, 그날은 그러기가 싫었다. 이제 11살인데 2ℓ짜리 생수병을 기울여 물을 못 따를 이유가 없다. "엄마도 밥 먹고 있잖아. 생수병 저기 있어. 물 갖다 먹어요"하고 내버려 뒀다. 아이는 얼른 일어나 자기 먹을 물을 가지고 왔다. '내가 버릇을 잘 못 들여서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작은 일이라도 스스로 할 수 있게 해야 하고 다른 이의 돌봄이나 도움을 받는 데 너무 익숙하게 하면 안 된다 싶었다. 한 단계 더 따져 보니 '저 녀석 저러다 나중에 결혼한다면 아내에게 구박깨나 받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이고' 했다.

맞벌이는 아주 익숙한 단어가 되었는데 맞살림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아직도 집안일과 육아는 아내가 주로 하고 남편은 주변에서 도와주는 역할인 가정이 대부분이다. 맞벌이와 맞살림은 함께 가야 하는 일인데도 말이다. 기자는 살림과 아이 돌봄을 시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그러다 얼마 전 시어머니가 심한 감기로 일주일간 집에 못 오신 적이 있다. 겨울 방학 때라 아이는 친정어머니와 시아버지가 번갈아가며 돌봐주셨고 집은 엉망진창이었다. 퇴근 후 아이 숙제를 봐준 뒤 세탁기를 돌리고 어질러 놓은 집을 대충이나마 손보고 나면 밤 9시가 훌쩍 넘었다. 아이가 먹을 반찬 만들기는 어림도 없었다. 그 와중에 남편이 한 일은 없었다. 별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게 정확하다. 평소에 우리 부부가 살림을 어떻게 해왔는지를 알 수 있게 됐다.

우리 같은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집이라면 생활이 어떨지를 바로 깨닫게 됐다. 시어머니가 안 계시면 아이는 종일 혼자 있어야 하고 밥도 스스로 챙겨 먹어야 한다. 기자가 퇴근하면 미리 준비된 저녁상도 기대할 수 없다. 어떤 워킹맘은 점심시간에 부리나케 장을 보고 회사에 두었다가 퇴근하면서 가져가 저녁 준비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아이 어린이집 마치는 시간에 늦지 않게 가서 데려올 수 있다는 거다. 남편은 일찍 퇴근하기가 불가능하니 자신이 다 맡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맞벌이는 선택이지만 결혼을 하고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이룬 부부에게 맞살림은 필수다. 한 사람의 희생만으로는 가정이 건강하게 꾸려지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맞살림을 실현하려면 기자부터도 남편이 할 일을 정하고 맡겨놓는 노력을 해야겠다. 그래야 아들도 그런 아버지를 보며 맞살림이 당연한 거라 보고 클 테니 말이다.

스포츠레저부 jador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