딛고 선 곳이 처한 시대적인 상황 때문일까. 대통령 선거를 앞둔 사회 분위기의 영향 탓인지도 모르겠다. 특이했다. 조연이 주연보다 더 마음에 들어왔다. 시나리오가 조연 중심으로 전개된 것은 아니다. 극적인 효과가 주연보다 감동적일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흑인'과 '여성'이란 이중의 굴레를 극복하는 주인공보다, 주인공의 재능을 알아보는 조연이 더 인상 깊었다.

영화 '히든 피겨스' 얘기다. 미국이 러시아와 우주 개발 경쟁을 펼치던 1960년대 NASA(항공우주국)의 우주선 발사 성공의 숨은 주역을 다룬 영화다. 시대 최고의 두뇌집단이라는 NASA에서 아프리카계 흑인 여성 3명이 인종 차별의 벽을 극복하는 과정을 그렸다. 주인공은 실존 인물들이어서 재미를 더했다.

영화를 본 뒤 머릿속에 꽂힌 배우는 조연인 케빈 코스트너였다. 왜 그랬을까. '숨은 인재들'이라는 제목에서 받은 선입견이 너무 강했던 걸까. 리더십에 대한 지극히 편향된 개인적인 취향은 케빈 코스트너의 역할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역할 그 자체가 호감을 줬다. 그의 역할은 NASA의 우주 개발 임무 프로젝트 수장인 앨 해리슨. 러시아를 앞질러 우주 탐사에 성공하고, 주인공인 캐서린 존슨이 수학 천재이면서도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하는 이중 차별의 장벽을 제거하는 연기를 했다. 특히 사무실에서 800m나 떨어진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을 사용해야 하는 차별을 눈물로 호소하는 캐서린 존슨보다, 해머를 들고 '유색인종 전용'이라는 팻말을 깨부수는 장면에 마음이 동했다.

앨 해리슨이 없었으면 캐서린 존슨은 흙 속에 묻힌 진주에 불과했을 것이다. 캐서린 존슨이 달 착륙과 무사귀환이 가능하도록 한 우주선의 궤적을 정확히 계산한 것도 앨 해리슨이 회의장을 열어준 덕분이다.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캐서린 존슨이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하자 앨 해리슨은 자신의 권한으로 들여보냈다. 이 조치로 숨겨진 천재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으니 캐서린 존슨은 비로소 빛을 발했다.

그렇다. '인사가 만사'이고, 리더는 똑똑한 사람을 알아보는 재능이 있으면 그만이다. 일은 조직원들이 하지만, 배치는 리더가 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지 않나. 최적의 자리에 배치해 최고의 효과를 이끌어 내는 게 리더의 덕목이다. 현장에 직접 나서서 몸소 어떤 일을 하는 지도자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은 역사책에도 많이 나온다.

기원전 202년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말이다. "나는 장량처럼 교묘한 책략을 쓸 줄 모른다. 소하처럼 행정을 잘 살피고 군량을 제때 보급할 줄도 모른다. 병사들을 이끌고 싸움에서 이기는 일은 한신을 따를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세 사람을 제대로 쓸 줄 안다. 반면 항우는 범증 한 사람조차 제대로 쓰지 못했다. 이것이 내가 천하를 얻고 항우는 얻지 못한 이유다." 유방은 인재를 적재적소에 잘 기용해 초패왕 항우를 물리쳤다. 장량은 전략가, 진평은 떠돌이, 번쾌는 개고기 장수, 주발은 거리의 악사, 평월은 강도 전과자였다. 한신은 시장바닥의 건달이었다. 그러나 유방은 한 가지씩의 뛰어난 재주가 있으면 그에 걸맞은 자리에 중용했다. 우리는 이런 걸 안목이라고 한다.

이쯤 이야기하고 나니 제대로 된 리더를 만나지 못해 재능을 썩히는 것도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삶이 개인 의지와 무관하게 돌아갈 때가 많은 게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피부색과 성별, 흙수저와 같은 출신 성분 때문에 당하는 '모태 편견'이 대표적이다. 이런 세상의 편견과 이를 당연시하는 관습을 깨줄 리더를 만나지 못해 재능을 썩히는 사람은 한둘이 아닐 것이다. 편견 때문에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 사회는 발전이 없다.

리더십은 그래서 중요하다. 편견과 관습을 깨뜨릴 수 있는, 사람이 가진 숨겨진 재능을 알아봐 주고 적재적소에 기용할 수 있는 그런 리더십 말이다. 탄핵정국과 조기 대선이라는 국가 혼란은 바로 자기 옆에 있는 사람만 믿으며 국정을 운영하다가 초래되지 않았나. 리더가 사람을 보는 슬기로운 눈이 없어서 생긴 일이다. 게다가 돈도, 부모도 실력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많이 기울어진 운동장도 바로잡아야 한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기회도 사회가 보장해야 한다.

요즘 우리 사회는 국가 최고 지도자를 뽑는 선거전이 한창이다. 선거는 국민이 대통령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행위다. 국민은 대통령을 가려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제대로 된 리더의 출현이 운명이라며 손 놓고 기다릴 일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리더십의 출현은 국민의 손에 달려 있는 셈이다. 더욱이 지금의 혼란을 기회로 바꾸는 강력한 리더십의 출현은 검증이라는 매서운 담금질 과정을 거쳐야 한다. 편견과 습관에 벗어난 투표 행위도 무엇보다 중요하다.

경남취재본부장 sbj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