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을 코앞에 두고 후보들이 벌이는 토론의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는 이 시점,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르피가로'의 칼럼니스트로 많은 글을 남겼었던 레몽 아롱(Raymond Aron)의 젊은 날의 한 일화가 생각이 난다.

당대 지성계의 산실이라고 여겨지던 프랑스 파리고등사범대학, 에콜 노르말 쉬페리에르에서 수학했던 아롱에게 어느 날 한 장관이 질문을 한다.

"당신이 만약 장관의 자리에 있다면 무엇을 할 것입니까? 당신의 생각을 들려 주세요." 정치철학에 탁월했던 아롱은 그 즉시 무척이나 흥미로운, 그야말로 '파리고등사범대학'에서 들을 만한 이론적으로 세련되고 훌륭한 그럴싸한 대답을 한다. 장관은 그 답을 들은 후 다시 질문한다. "무척 흥미로운 대답이군요. 만약 당신이 정치인이라면 도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요?"

아롱이 훗날 기억하길, 그는 두 번째 질문에 그다지 훌륭한 답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한다.

아마 아롱이 이 일화를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였던 것은 말로만 하는 정치적 언동과 실질적인 정치적 이슈에 대해 대안을 찾는 것의 차이를 알리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젊은 날 아롱에게 이 계기가 있었기에 그는 정치라는 물음에 있어서 단순히 '그럴싸한 답'에 현혹되지 않고 실질적인 대안이나 중요한 가치를 추구하는 학자로 성장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정치적 슬로건이나 표면적인 모습과 실질적 대안을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특정한 일에 쉽사리 분노하거나 기뻐하거나, 아니면 특정 후보를 무조건 좋아하거나 싫어하기에 앞서 사회적 현실의 복잡함을 정확히 이해하여야 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난 37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한국의 민주주의의 점진적인 진화 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1980년대 격정의 변화에 흔들려 쓰러질 것 같았던 한국 사회는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그 후, 빠른 경제 성장으로 한국 사회가 선진화되어 가는 모습도 지켜볼 수 있었다. 소득증가가 순조롭게 재산증가로 이루어져 가는 과정이었다.

한국은 부의 생산방식에 있어서 '성공모델'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한국 경제는 빨리 올라간 만큼 빨리 식었고 그에 따른 부작용도 보이기 시작했다. 밀레니엄에 들어설 무렵 경제성장이 침체되고 빚을 진 라이프스타일은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변화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의 인구구조에도 변화가 생겼다. 현재 변하고 있는 한국의 인구구조에 있어 이주민 숫자가 상대적으로 미미한 정도에 불과하지만 이는 결코 무시할 만한 숫자가 아니다. 한국의 선거와 지도자들의 국가정책에 그들도 중요한 이해당사자가 되어가고 있다.

나라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기성세대에게는 과거의 찬란한 기적이 향수로 남아 그 화려함을 재생시키려는 욕구가 강하다. 반대로 젊은 세대에게는 정권유착과 부정부패가 판치는 사회에서 자기들의 미래는 불투명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기성세대가 '하면 된다'는 신화를 창조했다면 젊은 세대는 '해도 안 된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다.

대통령 임기를 5년으로 제한, 합의했는데도 불구하고 정권 이양의 트라우마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현주소인 듯하다. 정권이전의 순조로운 과정과 정치적인 중재 과정이 아직 미숙하다. 그리고 입법, 사법, 행정기관들이 국민의 기대에 못 미쳐 리더십 부재, 정책 마비, 부서 간의 불필요한 경쟁을 일으키고 권력남용과 언론플레이 등이 국민을 좌절시킨다. 그래서인지 오늘날의 우리는 약간의 자극을 받을 때조차 비건설적인, 불필요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이는 경제뿐만이 아니라 창조적 아이디어의 침체를 야기한다.

선거는 단순히 민주적 절차만 아니라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논하는 시간과 공간이다. 선거 전에 후보자들은 무조건 승리를 위해서 자기 지지자들의 숫자를 잘 관리해야 하지만, 인기를 위한 선동가의 달콤한 말은 그저 귀에만 달달할 뿐이다. 선거가 끝난 후 바람직한 지도자는 그의 정책 집행 성과로서 지지자들을 끌어모아야 한다. 파벌조성, 이기적인 지역감정, 좁은 편견으로 불화를 일으키는 방법은 선거에서 이기는데 도움이 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불행의 원인을 키우는 결과를 낳게 된다. 현재 한국에는 다음 5년을 마련할 수 있는 지혜로운 판단이 요구된다. 이 시점 한국이라는 나라에 필요한 것은 분열이 아닌 통합과 냉철한 판단이 아닐까 한다.

부산국제교류재단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