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정부는 '문화융성'이라는 기치로 예술계를 현혹했다. 그러나 결과는 다 알다시피 블랙리스트라는 암흑의 통제였고 문화 파탄이었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문화예술인들은 큰 상처를 입었고 분노했다.

그런 만큼 새 정부에 거는 기대가 크다. 먼저 대통령 후보로 나서며 내세운 공약이 열다섯 가지다. 성급하게 하지 말고 하나씩 착실하게 해야 한다. 모든 기조와 시스템이 철저하게 송두리째 무너진 만큼 단시일에 되돌리기도 쉽지 않다. 벌써 이에 편승하려는 이합집산과 새 정부의 지원금에 눈독을 들인 새로운 조직들이 꿈틀대는 게 감지된다.

무엇보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블랙리스트를 비롯한 문화예술계 적폐 청산에 앞장서고 박근혜 정부에서 망가졌던 문화 행정 개혁에 나설 것이라 기대한다. 정부 차원에서 블랙리스트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전모를 밝히는 백서를 만들고, 민주주의와 문화예술을 복원하기 위해서라도 관계된 '부역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새 정부의 핵심 철학이,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이라니 다행스럽다. 문화예술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을 준수하면서 자율에 맡기면 된다. 자기 생각과 같다고 더 퍼주는 것은 결국 후유증과 부패를 동반한다. 문화예술계의 자정 능력을 믿고 창작과 표현의 자유 보장, 문화예술행정 기관의 독립성 보장, 현장 중심의 문화예술정책 등을 수립해야 한다.

예술인 복지 향상에 대한 기대감도 크다. 도 장관은 프랑스 공연예술 비정규직에 대한 실업수당 제도인 '엥테르미탕'을 표방하며 "'예술인 복지법'을 손보고 '예술인 복지금고'를 채워 어려운 예술인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작가들이 생계 걱정에서 벗어나 마음껏 창작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 같은 지적은 대체로 많이 나온 것이다. 이에 덧붙여 지역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으로서 한두 가지만 더 부탁하고 싶다.

첫째, 지역문화 분권화로 문화다양성 확보에 노력해 달라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대부분이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지역화 가치에 기반한 문화행정이 확립되어야 지역이 수도권 문화의 아류로 전락하지 않는다고 맞장구를 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의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않고 정책이 나오지도 않는다. 국민이 문화 혜택을 누리고 질 높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지방의 문화예술 지원에 더욱 많은 관심과 정성을 기울여야만 한다. 시골에 공연장을 짓고 교향악단을 만들어 키우자는 것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지역 문화예술의 체질을 개선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아울러 지역문화에 관한 이론적 성과를 지속적으로 제공해 지역 문화예술가들이 당위성과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역 할당제도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지역분권형 문화 균형 전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정책의 수립과 실행에서 중앙이든 지방이든 행정관료의 손에서 자율성을 기대하기는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단순한 권한 이양만으로는 안 된다. 실질적인 지역의 자율성이 보장되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둘째, 문화예술인을 행정 전문가로 만들려고 하지 말아주기 바란다. 현재 정부의 문화정책은 지역이나 장르 등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공모를 통해 골고루 평면화된 지원만 하는 아주 소극적인 정책이다. '소액 다건' 주의인데, 이를 위해 수많은 예술인이 몰려든다. 하지만 공인인증서와 인터넷, 결과보고와 정산절차와 같은 장벽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다.

올해부터 사용하고 있는 'e-나라도움'이라는 프로그램은 실제로 비영리법인인 예술단체를 영리법인과 동일하게 취급하기 시작한 징후라고 주장하는 이도 많다. 국고보조금의 중복 및 부정수급을 막기 위해서라지만 시스템이 워낙 까다로워 많은 예술인이 보조금을 포기한다. 시스템에 갇혀 행정적인 절차에 짓눌리다 보니 정작 창작행위 자체가 위축되는 것이다.

문화예술인은 거창한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창하고 획기적인 정책에 불안해한다. 그냥 내버려 두면 되는데 지금껏 정부가 문화정책을 개발한다고 하면 오히려 예술가들은 불편해지고 조직의 틀과 규제에 얽매이게 되고 만다. 지원의 문턱은 낮게, 창작은 새들보다 더 자유롭게….

소설가·한국작가회의 경남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