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만 보면 애가 탔고 붉은 색만 보면 피가 끓는다’고 말하는 멋진 남정네의 작품을 만나러 가는 길, 간드러지게 비가 내렸다.

누구나 노력해도 안 될 것 같은 것이 하나씩은 있다고 하는데 내겐 그것이 그림이다. 네모나 동그라미도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내게 화가는 언제나 경외의 대상이다. 긴긴 시간 책상 앞에 앉아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나 머릿속에 혹은 가슴속에 감춘 풍경이나 사연을 캔버스 안에 풀어 놓는 작업이나 그 지난함은 같을진대 완성품만 놓고 보자면 읽지 않으면 대화 자체가 되지 않는 글에 비해 한 치의 틈도 주지 않고 들이대는 그림이야말로 뇌쇄적인 셰에라자드이다.

백두산 장군봉, 태백 구문소, 다대포, 금산 보리암, 독도, 울릉도, 제주도 산방산 그리고 하늘과 땅 Ⅰ, Ⅱ, Ⅲ. 붉은 빛의 화가 박윤성의 그림에 달린 제목들이었는데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화폭에 담은 박윤성 화백 개인전 이름은 ‘우리의 땅과 하늘’이었다.

‘말이 필요 없으니 영혼으로 이야기하자’라고 감성을 자극하는 그림과 달리 온통 붉은 빛의 박윤성 화백 그림은 이성의 눈과 마음까지 일깨우는 듯했다. 그 중 특히 내 마음을 소용돌이치게 한 그림은 ‘부산항의 아침’과 ‘부산항의 밤’이라는 제목의 두 그림이었다. 몽환적인 보랏빛에 가까운 바닷물과 동글동글하고 나지막한 산, 달걀 노른자위 섞인 듯한 건물 위아래를 떠다니는 붉은 빛은 다른 지역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부산의 밤풍경이었다. 밤풍경과 쌍벽을 이루는 ‘부산항의 아침’은 영도대교 아래 조각조각 배가 떠 있었는데 물길을 가르며 지나는 배들이 마치 하늘로 날아가는 로켓을 연상시켰고 떠오르는 태양은 온 천지를 붉게 물들이고 있어 생동하는 부산항의 모습 그 자체였다.

전시장을 둘러보고 나와 둘러앉은 자리에서 일행 중 한 명이 내 마음을 읽은 듯 ‘인상 깊은 그림이 ‘부산항의 밤’이었다’고 서두를 꺼냈다. 그러자 모두 너도나도 부산항의 밤 불빛과 영도대교에 대해 한마디씩 했는데 이야기의 줄기는 어느새 박 화백의 그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낙동강’으로 번졌다. 낙동강 이야기를 하면서 피해갈 수 없는 4대강 사업이 도마 위에 오른 건 당연했는데 혼술로 내공을 다지고 있다는 이 선생이 갑자기 큰소리로 “낙동강 파수꾼이 지하에서 울고 있다”라고 일갈했다. 먹물 번지듯 퍼져 나간 이야기는 끝 간 데 없이 흘러 어느새 낙동강의 파수꾼이라는 별명의 소설가 요산 김정한으로까지 가 닿은 것이다. 사실 나는 출근하지 않는 날을 제외하면 매일이다시피 박 화백의 낙동강을 감상하고 있다. 내가 근무하는 요산문학관 내에 그가 기증한 ‘낙동강’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 속 낙동강 물은 어느새 무딘 칼에 붕대까지 감아 슬쩍 찌르는 시늉만 해대는 언론을 치고, 정작 돌아봐야 할 곳은 외면한 채 유세장을 방불케 하는 사람 많은 곳만 찾아다니는 장(長)들을 겨냥하는 장(場)으로 흘러 들었다. 그 와중에 우리는 말만 하면 되는 듯이 박 화백의 ‘부산항’ 그림을 부산시청 로비에 걸기도 하고 여러 가지 시정 사항을 건의하기 위한 ‘통촉위원장’까지 만드는 업적(?)을 쌓았다. 그림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줄줄이 딸려 나와 이렇게 저렇게 엮여 나갔지만 그날 결론은 한 가지였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드라마의 한 장면을 연상했다. 여자 주인공을 향해 “내 안에 너 있다”고 고백하는 남자주인공. 몇 년 전 부산의 모습만을 담은 ‘부산전’을 펼친 박 화백이나 그림을 매개로 부산의 현안에 대해 이런저런 문제점과 대안을 내놓은 이들의 마음은 결국 부산 사랑으로 귀결된다.

프랑스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은 일을 마친 농부 부부가 발아래 씨감자가 든 바구니를 두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평화로운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원래는 바구니가 아니라 아기 시신이 든 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림을 본 친구의 권유로 관에서 바구니로 바뀌었단다. 그 사실을 살바도르 달리가 알아챘고 박물관 측의 최신 기계를 이용한 조사 결과 사실로 밝혀졌다고 한다. 그날 우리 일행을 그림 속에 부산 사랑을 새겨 넣은 박 화백의 본뜻을 읽어낸 달리라고 하면 웃으시려나?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