섀도보팅(shadow voting, 그림자투표) 제도가 작년을 끝으로 폐지됐다. 1991년 도입된 섀도보팅은 투자자(주주)의 주주총회에 대한 무관심으로 정족수 미달이 발생하여 주주총회가 무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즉, 증권투자자의 주식을 예탁받아 관리하는 예탁결제원이 주주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주주들의 의결권을 주주총회에 참석한 주주의 찬반 비율과 동일하게 행사해 정족수를 충족시켜주는 제도이다. 비율로 봤을 때 마치 그림자처럼 의결권을 행사한다고 하는 데서 섀도보팅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하지만 그간 기업들은 주주들의 주주총회 참석을 독려하기보다는 정족수 확보의 손쉬운 수단으로 섀도보팅을 이용해 왔다. 이로 인해 의결권 행사의 왜곡을 가져오고 소수 경영진이나 대주주의 경영권 강화 수단으로 악용된다는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지난 4년7개월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폐지된 것이다.
섀도보팅 폐지로 일부 상장법인에서는 주주총회 정족수 확보를 우려한다. 하지만, 매번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서는 기업 지배구조의 투명성과 신뢰도 제고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언제까지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섀도보팅의 그늘에서 안주할 것인가. 우리나라 자본시장 발전에 걸맞게 이제는 주주총회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할 때다. 형식적으로 운영되는 주주총회가 명실상부한 주식회사의 최고의사결정기구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주주총회 활성화를 위해서는 우선 주주의 주주총회 참석 지원을 위한 기업들의 자발적 노력이 필요하다. 여러 회사가 한날한시에 주주총회를 열어 주주들의 참석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는 소위 ‘슈퍼 주총데이’, 아니 ‘스튜핏 주총데이’ 관행은 개선돼야 한다. 주주총회를 분산 개최해 보다 많은 주주가 참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주주총회 참석이 어려운 주주들을 위해 전자투표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2009년 도입된 전자투표제도는 주주총회에 참석하지 않고서도 전자적 방법을 통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다. 생업 종사나 주주총회 집중 등 현실적 한계로 주주총회 참석이 어려운 주주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대안이다. 현재 예탁결제원이 전자투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에서도 전자투표를 할 수 있는 모바일 전자투표서비스까지 도입해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의결권 행사가 가능하게 됐다. 최근 SK그룹이 5대 그룹 최초로 주주총회 분산개최와 전자투표 이용 계획을 발표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투자자들 또한 주주총회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주주총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아무리 기업이 노력하고 좋은 법률과 제도가 있다 해도 정작 주주총회 구성원인 주주가 빠진 주주총회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굳이 ‘주주행동주의(shareholder activism)’나 ‘권리 위에 잠자는 자’라는 말까지 갈 필요도 없다. 투자의 귀재라 불리는 워런 버핏은 “주주들은 자신이 투자한 기업의 경영에 보다 현명해져야 한다”고 했다. 최근 기관투자자의 적극적 의결권 행사를 유도하기 위한 지침인 스튜어드십 코드의 도입도 주주총회 문화 개선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주주총회의 모범사례는 워런 버핏이 CEO로 있는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총회다. 매년 5월 축제와도 같은 분위기 속에 개최되는 이 회사의 주주총회에는 작년에도 4만여 명이 참석하여 주주와의 의사소통을 위한 주주와의 대화(Q&A session)가 3시간 이상 진행됐다고 한다. 소액주주와 경영진 간 논쟁이 오가는 주주총회 뉴스만 접했던 우리로서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주가(A주의 주가는 3억 원을 넘는다)를 자랑하는 버크셔 해서웨이가 올해도 포천이 선정한 ‘전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에서 최상위권(4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곧 3월이면 상장법인의 주주총회 시즌이다. 정부는 태스크포스를 가동하여 섀도보팅 폐지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주주총회를 활성화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소액주주가 의결권 행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이러한 의결권 행사는 주주총회 본연의 기능을 다하게 하고 나아가 우리나라 자본시장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계기로 이어질 수 있다. 모바일 전자투표 도입 원년이 되는 올해, 주주총회 참석이 어렵다면 집 혹은 사무실 어디서든지 잠깐 시간을 내어 모바일 전자투표를 통해 의결권을 행사해 보자.
한국예탁결제원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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