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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 ‘세월’이 흘러도 /권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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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8-03-07 19:29:30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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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바쁜 아침이었다. 그때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2004년 5월 19일. 차를 몰고 출입처를 옮겨가던 중 민주노총 건설노조 측의 전화를 받았다. “아파트 공사장에서 근로자 3명이 추락한 것 같습니다. 생사를 확인하기 어려운데, 시공사가 노조의 진입을 막고 있습니다.”

곧장 차를 돌렸다. 상황은 노조의 설명 그대로였다. 이미 공사장 모든 입구는 바리케이드로 차단돼 있었다. 바리케이드 뒤론 작업조끼를 입고 안전모를 쓴 시공사 관계자들이 스크럼을 짜고 섰다. 살기마저 느껴지는 그들의 눈빛은 역설적으로 애처로웠다.

이미 사고가 난 지 꽤 시간이 흐른 듯했다. 기자들이 몰렸다. “현장을 보겠다”고 요구했다. 방어막을 뚫으려는 취재진과 노조. 그럴수록 스크럼은 더 거칠어졌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비밀의 공간’을 지킬 듯한 기세였다. ‘출입 금지’ 표지를 붙인 바리케이드로 모자라, 일부 흥분한 시공사 관계자는 대형 가스통까지 들고 협박했다. “들어오기만 해봐, 확 터뜨려 버릴 테니!” 기자와 시공사 측 간 십 원짜리 욕설이 오갔다.

영화 ‘1987’의 시대에서나 벌어질 법한 상황에 당황한 건 기자들뿐 아니었다. 시공사 측은 누구든 가리지 않았다. 출동한 담당 형사와 검시관의 출입까지 막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탁! 치니 억! 하고 떨어져 죽었다” 식의 거짓말을 할 게 아니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고가 발생한 시간은 오전 8시께. 엘리베이터가 놓일 통로 34층 작업판이 무너지면서 근로자 3명이 지하로 추락했다. 시공사 측은 그러나 1시간40분이 지나서야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고 또 25분을 더 보낸 뒤에야 119에 구조를 요청했다. 물론 추락한 근로자 3명이 곧바로 숨졌을 것으로 보이지만, 시공사 측 대처에선 사람을 살리려는 노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아파트는 초고층으로 솟았다. 이듬해 준공된 이 아파트는 지금 부산 해운대 센텀시티의 랜드마크 대접을 받는다. 웅장한 높이와 화려한 외관만 남았을 뿐, 그때의 사고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14년 세월이 흘렀다. 주말을 앞둔 지난 2일 해운대해수욕장에 바짝 붙어 최고 101층 높이로 올라가는 주상복합건물 엘시티 공사장에서 근로자 3명이 추락해 숨졌다. 55층에서 안전 작업판(SWC)이 통째 무너졌다. 발판과 함께 떨어진 근로자 3명 외에 지상에서 일하던 근로자 1명이 숨지고, 4명이 더 다쳤다. 참사다.

엘시티 사고를 보며 14년 전 기억을 꺼낸 이유는 추락 상황뿐 아니라 돌아가는 사정이 매우 닮아서다. 두 사고 모두 역시나 원인은 안전관리 부실이었다(물론 엘시티 사고 원인은 조사가 완료되지 않았지만, 경찰의 중간 조사 결과를 보면 별반 다르지 않다). 하청에 재하청으로 이어지는 건설 현장 하도급 구조도 똑같이 문제로 지적된다. 사고 이후 경찰과 노동청이 조사에 나서고, 공사 현장에 작업중지 명령이 내려진 과정도 같다. 책임자 처벌도 14년 전과 비슷하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14년 전의 기억이 2018년 오늘과 겹치는 건, 그때의 시공사와 지금의 시공사가 같은 건설사라는 데 있다.

지금이 그때와 달라진 게, 아니 더 추가된 게 있다면 사고 이면에 각종 특혜와 비리가 얽혀 있다는 거다. 그래서 더 소름 끼치고, 무섭고, 성질나는 거다. 부산 해안과 매립지 곳곳에 이미 지어졌거나, 공사 중인 초고층 아파트 상당수는 언제 터질지 모를 ‘뇌관’이다. 그동안 숱하게 사고가 반복됐고, 자본과 권력은 뒷구멍에서 결탁했다.
부산을 벗어나도 아찔함을 떨칠 수 없다. 글을 쓰는 7일 오전 현재 경남 통영 해상에서 어선이 뒤집혀 4명이 숨지고, 4명이 실종됐다. 지난해 12월 15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천 영흥도 낚싯배 전복을 전후로 해상 인명사고가 줄을 잇는다. 희생자 수를 집계하기조차 미안한 제천·밀양 화재 참사도 얼마 지나지 않았다. 참사 원인을 파헤쳐보면, 여지없이 불법과 편법이 판쳤다.

그렇게 눈물겨운 ‘세월’을 보내고,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 아직 세상은 달라진 게 없다. 또다시 새로운 세월이 무심하게 다가온다. 14년 후의 세상을 상상해본다. 새로이 맞이할 세월은 제발 ‘사람이 먼저인 세상’이기를 바란다.

디지털뉴스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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