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이미 2월 말부터 시작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첫 소식은 크로코스(crocus)였다. 햇살이 잘 들어 오는 뒷마당에 심은 크로코스의 잎이 가장 먼저, 아직은 얼어 있는 땅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3월이 되니 노란 꽃봉우리가 어찌나 선명한지, 그 작은 꽃이 밭도랑을 만드시던 앞집 할머니 눈에도 들어올 정도였다. “참 이쁘네. 무슨 꽃이여 저게.” 하지만 다음 날 내린 폭설로 참사를 겪기도 했다.
크로코스의 꽃이 진 후 뒤를 이은 식물은 수선화였다. 참 신기하게도 수선화는 꽃이 나팔모양이라 그런지 피어나면 온 마당에 ‘봄이 왔다’고 나팔을 부는 듯하다. 지금은 알뿌리에서 돋은 큰 잎 사이로 튤립 꽃대가 올라와 꽃망울이 하나둘씩 터지고 있다. 작년 가을 알뿌리 150여 개를 화단 흙 속에 눌러 심어두고 내년 봄에는 튤립 꽃잔치를 해보리라, 마음 먹었는데 그 결실이 올라오는 중이다. 봄의 정원은 다른 계절보다 유난히 맘을 설레게 한다. 정원 한 바퀴를 돌고나면 나조차도 잊고 있었던 내가 심은 식물들이 긴 겨울 보내고 다시 싹을 올리는 모습에 고맙다는 말이 뭉클하게 올라온다.
영국의 내셔널가든스킴(NGS)의 발표에 의하면 설문 조사에 응한 영국인 응답자의 39%가 정원에 있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의 회복을 느끼고, 79%는 정원을 갖는 것이 삶의 질을 높이는 방법이라고 답변했다. 2014년 영국의 신경정신과 의사 슈 스튜어트 스미스(Sue Stuart-Smith)는 정원 일과 우리의 정신 건강에 대한 이런 글을 쓰기도 했다. 그녀의 환자였던 40대 여성은 어린 시절 폭력적인 집안 환경에서 자라나 그 여파로 20대, 30대까지도 타인과의 관계를 잘 풀 수 없어 정신 치료를 받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40대에 정원 일을 시작하면서 그녀에게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그녀는 자신이 정원에서 일을 하면서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마음을 처음으로 가져봤다고 했다. 정신과 의사 슈는 그녀의 이런 자존감 회복은 식물과의 소통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상처를 받는 일의 상당 부분이 타인과의 접촉에 의해서다. 우리는 잘잘못을 따지는 평가를 늘 당하고, 또 누군가에게 하며 살아간다. 뒤처지지 않게 이웃해 살아가는 동료, 친구와 경쟁해야 하고, 더 많은 잉여 성과를 내기 위해 집착한다. 게다가 요즘과 같은 SNS의 폭주는 또 다른 사회적 정신 건강 문제를 가져오는 중이다. 속사정을 잘 알지도 않은 누군가에게 폭언과 충고를 서슴지 않고, 그것이 얼마나 상처를 주는지에 대한 배려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와 언어로 소통하지 않는 식물은 모든 것이 좀 다르다. 우리보다 조용하고, 덜 경쟁적이고, 덜 도전적인 비교적 단순한 삶을 살고 있는 식물은 우리에게 좀 다른 소통을 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는 타인과의 대화와 생활에서 겪는 상처와 불안, 집착이 식물과의 소통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셈이다.
정신과 의사 슈는 ‘정원 일은 우리가 하는 종교적 의식’과 비슷한 정신적 작용을 한다고도 말했다. 종교의식이 우리 마음속에서 걸러지면 좋은 수많은 찌꺼기를 버리는 일이듯이 정원 일을 하며 일어나는 식물과의 말 없는 소통이 우리 내면의 정화를 이뤄낸다는 것이다. 물론 슈의 이론도 과학자로서 하나의 견해일 뿐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과학적이라는 증명도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서 그게 아니었다고 뒤집힐 이론일 수도 있으니 맹신은 늘 언제나 경계를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적어도 그간 정원 일을 해왔던 내 개인적 경험에 비춰보면 그녀의 이론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슈는 자신의 글을 정원 일이 주는 상실감과 상처의 이야기로 마무리했다. 아무리 정원 일이 좋다 해도, 작년에 봤던 식물이 올해 보이지 않을 때, 뿌린 씨앗이 올라오지 않을 때,우리는 상처를 받는다. 그래서 그녀는 정원을 시작하려는 이들에게 어렵지 않은 식물부터 시작하라고 권한다. 정원 일의 전문가인 나의 의견도 같다. 살기 어려운 식물은 사는 식물에게도,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도 힘든 일일 수밖에 없다. 정원디자인의 첫걸음이 언제나 그 지역에서 자생이 가능한 식물의 리스트를 뽑는 일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자세히 우리 집 화단을 다시 쳐다보니 작년에 심은 150알의 튤립 중 몇은 분명 싹이 보이지 않는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했지만 실은 심은 대로 거둘 수가 없는 것이 자연의 일이다. 중국 격언에는 씨앗을 심을 때 4알을 심으라고 한다. 하나는 새에게, 하나는 죽을지도 모르는 식물 때문에 맘 아플 나를 위해, 그리고 두 알을 거두라는 의미다. 중요한 것은 심은 대로 거둘 수 없다고 해도 무엇인가를 심었다면 식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최선을 다해 살아가기 위해 애를 쓴다. 그리고 애쓰는 식물의 모습에 우리의 마음도 함께 ‘살아보자’고 위로를 받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비록 심은 대로 거둘 수 없다 하여도 오늘은 심어보자!
작가·가든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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