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화병은 상호보완 관계다. 꽃이 아름다울수록 화병의 가치가 살아나듯, 화병이 좋을수록 꽃의 아름다움은 빛난다. 오늘 남북 정상이 마주 앉는 판문점 평화의 집 회담장을 장식할 꽃과 화병이 그렇다. 작약과 박태기나무 꽃, 데이지, 비무장지대의 야생화, 제주 유채꽃 등이 백자 달항아리에 담겨 남북 정상을 맞는다. 회담의 성공에 기여할 조연들이다. 비록 조연이지만 깃든 의미는 각별하다.

붉거나 흰 꽃이 크고 탐스러워 함박꽃이라 불리는 작약은 관상용으로 으뜸이거니와 약효도 뛰어나다. 동의보감에는 ‘간을 보하고 배 속이 아프거나 월경이 막혀 나오지 않는 것을 치료한다’고 적혀 있다. 서양에서도 최고의 효능을 가진 약초로 취급했다. 영어이름 ‘peony’는 그리스 신화의 의신(醫神) ‘파이온(Paion)’에서 유래했다. ‘누가 꽃에는 임자가 없다 했는고/임금님이 날마다 친히 보아주시는데/응당 일찍 여름을 맞이하면서/혼자서 남은 봄기운을 마무리하네’. 고려 신종 때의 학자 조통은 작약을 이렇게 노래했다. 작약은 남북 정상을 상징한다.

박태기나무는 다닥다닥 붙은 진홍빛 작은 꽃들이 밥알 모양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북한에서는 꽃봉오리가 구슬 같다 하여 구슬꽃나무라고 한다. ‘못난 내가 무슨 일 이룬다고/해마다 멀리까지 글 보내오시니/산앵두나무 꽃 핀 곳은 적지만/비슷한 박태기나무 꽃은 뜰에 그윽하네’. 고려 말의 학자 이곡의 시다. 당시 중국 원나라에 머무르고 있던 이곡은 형의 편지를 받고 이 시를 썼다. 박태기나무 꽃은 남북의 동포애를 상징한다.

유럽이 원산지인 데이지 꽃은 흰색이나 연한 홍색, 홍자색이다. 우리나라에선 주문진 속초 강릉 등 동해안에 많이 핀다. 꽃말은 평화와 희망이다. 이런 꽃들을 담을 그릇으로 보름달을 닮은 백자 달항아리 만한 게 없을 듯싶다. “흰빛의 세계와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의 원이 그려주는 무심한 아름다움을 모르고서 한국미의 본바탕을 체득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일그러지지도 않았고, 둥그런 원을 그린 것도 아닌 이 어리숙하면서 순진한 아름다움에 정이 간다.” 미술사학자 최순우는 백자달항아리에서 한국미의 원형을 봤다.

꽃들은 평화를 염원하는 남북 주민이나 다름없다. 남북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회담장은 꽃들의 소리 없는 환호성으로 일렁일 터이다. 70년 분단의 겨울 끝에 맞이하는 한반도의 봄이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