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갈등과 반목으로 점철됐던 동아시아와 미국 간 외교 관계는 2018년 초반부터 급박하게 반전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로부터 비롯된 회담의 가능성은 지난 2월 평창동계올림픽에 대한 북한 참가와 대표단 파견으로 이어졌다. 당시만 하더라도 북미 대표단의 만찬 테이블 합석이 불발됨으로써 갓 시작된 협력의 분위기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인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4·27 남북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한반도 문제에 관한 국가 간 관계는 한편으로는 평화와 협력 무드가 조성되면서도, 또 한편으로 더욱 복잡하고 난해한 함수관계에 빠져들었다. 남북 정상이 ‘판문점 공동선언’을 선포함으로써 평화 이행의 단초가 준비됐으나, 이후 우리 정부는 북미 정상회담의 준비단계인 한미회담을 이끌면서도,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국 소외론을 무마하고, 남남 갈등을 진화해야 하는 등 할 일이 산적해 있다.

제3차 남북 정상회담은 단 하루의 스토리만으로도 세계를 집중시켰다. 정상회담은 보통 개최 자체만으로도 세간의 이목을 끈다. 회담 주제와 결과물에 대한 관심은 당연하고, 이외에도 개최된 장소, 앉은 자리의 배치 심지어 악수의 강도까지 의미를 부여하고 숨은 뜻을 해석하려 든다. 정상회담은 당일 전까지의 물밑 실무회담을 통해 조율되어 회담 당일의 상황은 교환된 의견의 확인, 정상 간 관계 설정, 종료 후 선언에 대한 실무 이행 및 추후의 관계 진전이라는 기-승-전-결 구조를 띠게 된다. 정상회담 당일의 퍼포먼스는 담화 주제에 대한 합의와 함께 이에 집중된 국민과 제3국 정부 그리고 세계인을 향한 회담의 TPO, 즉 시간 장소 상황(Time Place Occasion)의 가시적 성과가 포함된다 하겠다. 현존하는 유일 분단국을 대표하는 두 정상의 회담은 만남의 시간과 장소, 상황과 전개 모든 순간이 은유이자 상징이었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은 1, 2차와 달리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에서 개최되었다. 그 덕분에 남북을 가르고 있는 연석을 두고 두 정상이 만나 악수하는 모습은 차라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도보다리 벤치에서의 완전한 밀담 장면은 새소리가 양각(陽刻)된 한 폭의 수묵화였다. 두 정상이 나란히 한 판문점 선언 모습은 ‘전쟁 종식(War is over)’이라는 자막과 함께 전 세계에 생방송되었다.

분단, 65년의 갈등이 내려앉은 판문점, 휴전 시기 강대국 논리에 의해 이름마저 널문리에서 강제 개명되었다는 판문점의 한 쪽이자 새로운 시대를 준비한 장소인 평화의집. 한 편의 부조리극은 이제 종식될 것인가. 한반도 문제를 앞두고 개최될 9일 한중일 정상회담도 한미 그리고 북미 간 회담 어느 하나 녹록해 보이지 않다. 특히 북미 정상회담은 회담의 날짜와 장소에 대한 다양한 예측이 오가는 상황에서 공표가 늦어지고 있다. 북한 문제에 대한 한미 정부의 신속한 진행에서 한 템포 시간이 생기자, 미국 내에서는 회담 주제에 비핵화 이외 문제를 포함하자거나 북한의 기만 시 행동계획을 세우자는 내용의 회의론이 제기되는 등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되기도 한다.

미국은 과연 이번 기회를 통해 한반도 질서를 이끌 게임체인저(game changer)로서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시기부터 통상과 안보의 연계전략을 통해 각 상대국과 묵은 문제를 해결해 왔다. 이전 정부까지 미 정부의 외교정책 기저라 여겨진 국제무대 민주주의 및 자유무역 질서 강조와 네트워크를 통한 관리 전략은 이번 정권에서 급변해 일대일 외교 관계에서 당면문제에 대한 거래 전략으로 전환됐다. 최근까지 트럼프 정부는 철강 및 알루미늄에 대한 고율 관세 명령을 우방과 제3국을 가리지 않고 부과하고자 압박을 가해 미 국내시장을 보호·관리했다. 더불어 미연방준비제도가 주도한 금리 인상 그리고 달러화 강세는 신흥국 재정 상황을 압박하고 있다. 어지러운 국제통상·금융 환경을 조성한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을 주도하며, 주고받기에 능한 협상가로 평가받아 왔다.

이제 한반도 문제가 미국으로 공이 넘어간 상황에서 트럼프 정부는 막중한 외교안보 숙제를 다각도에서 재단하고 있을 것이다. 1972년 닉슨 대통령은 베이징을 방문해 미중회담을 단행함으로써 냉전 시기 역사의 한 장이 되었다. 이제 남은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 세부절차와 종전논의를 완결해, 지난 세기 이데올로기 비극을 종식하고 새로운 평화의 시기를 이끈 주역으로 한미 두 정상이 기록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동아대 국제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