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하늘과 찬란한 태양이 있고 황홀한 신록이 모든 산, 모든 언덕을 덮는 이때, 기쁨의 속삭임이 하늘과 땅, 나무와 나무, 풀잎과 풀잎 사이에 은밀히 수수(授受)되고…’라는 이양하 선생님의 신록예찬이 아니더라도 감사의 빛깔 신록을 보노라면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그리움이 솟구친다. 45년 전, 우리에게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첨벙대고, 놀라고, 감동하는 아름다운 감성을 심어 주신 선생님은 시인이시자 전설의 국어 선생님이셨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 보다는 일본 도시샤대학 시절, 친구들과 마지막 소풍에서의 고뇌를 얘기해 주셨던 분, 살매 김태홍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은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를 탄생시킨 막걸릿집 주모, 공초 오상순이 친구들이 차려준 포장마차를 말아먹은 일 등 많은 시인과 그들의 시에 대한 얘기를 해주셨는데 특히 조지훈과 박목월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도 또렷하다.

“일제 강점기 말 진눈깨비 내리는 이른 봄, 오대산 월정사 강원의 강사였던 조지훈은 경주로 박목월을 찾아간다. 정지용의 제자인 둘은 이미 시를 통해 마음을 나누었지만 서로의 얼굴을 대한 적은 없어 플래카드로 맞이하고. 불국사와 석굴암, 경주 부근 옥천을 흐르는 낙동강, 옥산서원으로 이어지는 여정에서 나온 시가 조지훈의 ‘완화삼’이며 이에 대한 답이 박목월의 ‘나그네’이다.… 도대체 어떤 얘기들로 술잔을 채우고 밤을 지새웠을까?” 20대 초반의 두 청년 시인이 나누었을 문학적 사유와 체험에 대하여 선생님께서 주신 화두는 지금도 아름다운 의미를 생산하는 동사(動詞)가 되고 있다.

예전에 영화 ‘서편제’를 보면서 실컷 울다가 극장을 나섰을 때 거리의 풍경이 달라져 있던 기억이 있다. 동래학춤 구음(口音) 소리꾼 유금선 선생의 소리에서 묻어나던 애절함이 등을 휘게 한 경험도 있었고,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보다가 자리를 뜰 수 없었던 감흥으로 가슴이 저릴 수 있었던 것은 다 우리 선생님의 울림이 있는 가르침 덕분이다. 내가 후배들에게 ‘생물을 가르치지 말고 파브르의 삶으로 아이들을 유혹하라’고 말하는 것은 선생님을 흉내 낸 것이다.

수업 50분 가운데 절반 이상을 시인들의 질펀한 에피소드로 옆길로 가시다가 시간에 쫓기면, “책 펴라, 거기 밑줄 긋고 알았제? 자, 넘어간다”라는 식이었지만, 정말 군침 도는 수업이었다. 선생님의 투박하면서도 인간적인 감성은 매력 그 자체였고, 우리들의 가슴에 그리움이라든지 아쉬움, 꿈과 희망, 환희와 애수 등이 고이도록 해주셨다. 지금도 동기회에 가면 살매 덕분에 내 인생이 바뀌었다고 자랑하는 친구들이 있을 만큼…. 우리 선생님의 영향 때문일까, 나는 ‘교육(敎育)은 알게 하고 할 수 있게 하는 것(敎)만큼이나 아이들에게 느끼고 생각하고 감동할 수 있는 품성을 키우는 것(育)이 중요하다’라는 주장을 줄기차게 하고 있다. 아이들이 생각하고 느끼게 해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제 나는 선생님께서 주신 통찰을 되새기며 내가 가장 전율을 느꼈던 음악 한 곡을 스승의날에 선생님께 바친다. 구스타보 두다멜이 지휘하고 베를린 필이 연주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작곡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곡이다. 우리 선생님의 육성과 가르침을 닮은 곡이다. “짜식” 하시면서 흐뭇해하실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인트로에서 트럼펫이 팀파니와 함께 ‘신은 죽었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고 포효한다. 그리고 심벌즈가 웅장하게 팔을 벌리는 마지막까지의 1분 55초 동안, 대학 가면 ‘운동, 독서, 사색, 연애’ 많이 하라고 하셨던 고등학교 졸업식 날의 마지막 종례를 떠올린다. 그때 우리는 단순히 이 네 단어 중 ‘연애’를 ‘남녀 간의 사랑’ 정도로 치부하면서 환호했지만 살면서 선생님의 진의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여, 이제 겨우 독서와 인문학적 사유를 통한 주관적인 깨달음으로 인간적 변화와 성숙을 이끌어내고자 하셨음을 어렴풋이 짐작한다.

뻔하지 않은 삶을 살도록 유목적 사유의 바탕을 만들어주신 살매 선생님, 인간다움의 가장 아름다운 본성 중 하나인 그리움으로 우리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우리 모두 5월 동기회에서는 호기심과 열정이 있는 삶을 만들어주신 전설의 선생님들을 마음껏 그리워해 보면 어떨까? 그게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고마운 마음의 표시이자 제자로서 해야할 도리 아니겠는가!

부산시영재교육진흥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