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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소득주도 성장론에서 빠진 것 /황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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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8-09-05 19:25:08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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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너는 언제가 가장 행복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시기를 특정하긴 힘들지만 10대 때라고 대답한다. 내가 그렇게 대답하는 까닭은 1980년부터 1985년까지 중고등학교에 다닌 나는 공부한 기억이 별로 없어서이다. 그러니까 나는 중고등학교 때 아주 많이 놀았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자마자 실시했던 과외금지 정책의 최대 수혜자가 나였기 때문이다. 이런 말은 하면, 욕을 먹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전두환을 무척 고맙게 생각한다.

당시 부산 영도에 살았던 나는, 혹은 내 친구들은 별로 공부를 하지 않았다. 학교에 다녀오면 바다와 산으로 돌아다니며 놀았고, 방학 때면 더욱 신나게 놀았다. 일부 모범생을 빼고는 벼락치기가 공부의 전부였다. 숙제도 벼락치기, 시험도 벼락치기, 방학숙제도 벼락치기였다. 물론 그 벼락치기마저 하지 않는 맷집 좋은 아이, 간 큰 아이들이 주변에는 수두룩했다. 내가 늘 부러워했던 아이들은 숙제를 꼬박꼬박해 오는 아이들이 아니라 숙제를 해 오지 않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선생의 매타작을 견뎌내는 대범한 불량학생이었다.

그랬다. 나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당시 용돈이라는 게 없었던 우리는 전과를 산다고 돈을 받아서 보수동 헌책방에서 책을 사고 남은 돈을 삥땅쳤으며, 문법책을 산다고 돈을 받아서는 친구들의 문법책으로 ‘인증’ 받았다. 거짓말을 하는 학생이라고? 천만의 만만의 말씀이다. 가난했든, 조금 여유가 있었든 간에 우리의 부모들은 새끼들이 그렇게 삥땅치는 사실을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아주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학창시절에 공부를 하지 않고 뭘 했냐고?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늘 하루가 부족했다. 개학을 하면 참고서 산다고 삥땅칠 궁리를 해야 했다. 시험 기간이 되면 시험공부 한다는 핑계로는 외박할 궁리를 해야 했다. 수업시간에 교과서 밑에 소설책을 놓고 읽을 궁리를 해야 했고, 날마다 숙제를 어떻게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가 궁리를 해야 했고, ○○여고의 ×××를 어떻게 꼬실까 궁리를 해야 했고, 나이키를 구할(훔칠) 궁리를 해야 했고, 숨어서, 아니 당당하게 소주 한 잔 마실 수 있는 단골집을 확보할 궁리를 해야 했고, 술을 안 먹은 척, 담배를 안 피우는 척하는 궁리를 해야 했고, 그 모든 궁리를 다 하고 난 뒤에는 또 부모님을 염려하여 공부하는 궁리, 공부하는 척하는 궁리를 해야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궁리의 시작과 과정과 결과에는 언제나 공범자(친구)들이 있었고, 그래서 두렵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우리는 그렇게 불량하게, 그렇게 불법적으로, 그렇게 삐딱하게, 방목하고, 방목되면서 자랐다. 게 중 누군 대학을 갔고, 게 중 누구는 전문대를 갔고, 게 중 누구는 고등학교만 나왔고, 누구는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게 중 누군 대학에 가서 운동권이 됐고, 게 중 누군 회사원이 됐고, 게 중 누군 공무원이 됐고, 게 중 누군 버스 기사가 됐고, 게 중 누군 시인이 됐다. 그런데 게 중 누가 성공했고, 누가 실패했다고 말할 근거나 잣대 따위를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공부를 안 한 누가 더 불행하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당시 우리도 경쟁을 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성적 경쟁을 했고, 힘이 센 아이들은 주먹 경쟁을 했고, 간이 큰 아이들은 담력 경쟁을 했고, 글이든 그림이든 잘 쓰고 잘 그리는 아이들은 재주 경쟁을 했다. 그러나 그 잠깐의 경쟁이 끝나면 우리는 어울려서 작당하고 공모하고 궁리하면서 친구가 됐다. 어울려 노는 데는 공부도 주먹도 재능도 뒷전이었고, 다만 의기투합이, 의리와 베풂이 첫째 기준일 뿐이었다.
물론 작금의 무한경쟁시대에 이따위 소리가 얼마나 한가한 소린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시절, 우리는 비록 공납금이 밀리더라도, 밥을 굶더라도 의지만 있다면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교과서와 참고서 하나만으로 대학에 갈 수도 있었다. 그 시절을 미화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나 그 시절 내 부모도, 내 친구의 부모도 ‘사교육비’ 걱정 따위는 절대 하지 않았다. 성적에 따라, 빈부에 따라 친구를 나누어 사귀지 않았다. 무한경쟁의 입시교육 개혁이 빠진 ‘소득주도 성장’은 허구다.

작가·헤세이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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