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미국 뉴욕 시내 지하철역에서의 일이다. 월요일 이른 아침, 승강장 일대는 많은 시민으로 북적였다. 그 앞으로 천천히 들어선 열차 차량의 외면에는 수프 등 음식 캔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이를 본 승객들은 짐짓 탄성과 함께 박수를 쳤다. 월요일 출근길의 고단함과 허기진 속을 달래주는 듯해서다. 그들은 이 낙서 그림을 지하철 당국의 재치 있는 작품으로 여겼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낙서꾼들이 밤새 스프레이로 몰래 그린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뉴욕에 거주하는 이 같은 전문 낙서쟁이는 약 2000명으로 추산됐다. 시 당국은 이들이 곳곳에 남긴 낙서를 지우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요즘 미국 대도시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예컨대 샌프란시스코시는 올 들어 건물 벽면과 담장 등 거리 외관을 어지럽히는 낙서(그라피티)와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을 정도다. 이를 제거하는 데 해마다 200억 원 넘는 예산이 소요되는 데다, 건물주 등의 민원도 쇄도하자 강력한 단속의 칼을 빼 든 것이다.

사람 발길이 닿은 곳이면 세계 어디를 가도 볼 수 있는 게 낙서다. 유명 산이나 명승고적, 관광지 같은 장소일수록 더하다. 몽골 울란바토르의 상징물인 전승기념탑에 갔을 때, 곳곳이 낙서로 도배된 걸 보고 더 실감이 났다. 에베레스트산도 예외가 아니다. 산 베이스캠프 기념물에 중국어 등의 낙서가 넘쳐나자, 2년 전 티베트 당국은 낙서에 새겨진 이름을 언론에 공개하고 블랙리스트까지 만들었다.

낙서는 자신의 존재와 뜻을 드러내고 보존하려는 인간의 원초적 욕구와 충동에서 나온다. 그건 동서고금이 다를 바 없다. 한데 동서 간 차이는 있어 보인다. 서양인은 대체로 감상이나 느낌 같은 ‘문장 낙서’이고, 한국사람 등 동양인은 주로 자신의 이름을 적는 ‘성명 낙서’라는 점에서다. 그런 낙서는 인간의 욕구라 어쩌면 근절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이 적어 남기고 싶은 걸 표현하는 낙서대를 따로 두는 것도 한 방법이지 싶다.

부산시립미술관 야외 정원의 이우환 조각작품이 지난달 관람객 낙서로 얼룩지는 일이 또 발생했다고 한다. 세계적 거장의 예술품에 낙서 훼손이 반복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펜스를 설치해 접근을 막는 것은 작가가 원하지 않는다니, 아무래도 시민의식에 호소할 수밖에 없겠다. 비단 이곳뿐 아니라 다른 예술품이나 공공 구조물 등에서도 마찬가지일 터다. 결국 시민의식의 문제다.

구시영 논설위원 ksyo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