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를 학문으로 다루는 많은 이는 지금과 같은 국제 정치체제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만들어졌다고 본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 갈등인 ‘30년 전쟁(1618~1648)’의 마무리로 이뤄진 이 조약은 당해 국가의 군주가 종교적 선택권을 가진다는 점에서 이전까지의 종교적·정치적 일원성을 해체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즉, 교황권이 세속권보다 앞섰던 이전의 유럽질서는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개별적인 국가의 주권이 인정되거나 강화되는 쪽으로 재편됐다. 교황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보편적 유럽에서 개별 주권이 강조되는 국가체제의 유럽으로 변화돼 갔고, 이는 20세기 초 전 세계로 확장됐다. 오늘날에도 강조되는 외부를 향한 국민국가의 주권 독립성 개념이 이때 정립됐던 것이다.
1990년대 세계화의 물결로 인해 개별 주권을 근간으로 하는 국민국가 중심의 국제 정치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강하게 대두된다. 이른바 지구정치론에 대한 입장이다. 이전의 베스트팔렌적 국제 정치체제가 갈등과 협력이라는 국가 간 문제를 주로 다뤘다고 한다면 지구화라는 변환에 전 세계를 하나로 보는 글로벌 정치의 필요성이 긴박하게 요청된 것이다. 이를테면 지구온난화의 문제 등은 결코 국민국가 단위로는 해결될 수 없다. 국익을 바탕으로 하는 개별 국가는 지구촌 환경문제를 남의 문제로 떠넘기면서 근본적인 해결책에 고민할 이유와 여유도 없다. 지구를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보는 새로운 이해가 강조되는 것이다.
당장 전 지구적 단위의 세계 정부를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사람과 물자, 미디어 등의 폭발적 공유와 이동 등은 15세기에 만들어진 국민국가 질서의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더는 유용하지 않다는 점을 확인해주고 있다. 이제 지구촌을 살아가는 세계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고양하는 노력이 필요한 시기가 된 것이다. 내가 즐기는 아메리카노 커피는 제3세계 농업 노동자의 고통에서 비롯됐고, 내가 버리는 일회용 플라스틱 컵은 북태평양의 해양생태계에 해악을 가할 수 있다는 세계시민으로서의 자각이 필요하게 됐다. 당장은 세계시민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교 차원에서 노력하고 있지만 그 사정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시대착오적인 국가주의 망령과 잔재가 여전히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국가주의적 사유는 모세혈관처럼 곳곳에 숨어 있다. 당장 채택률이 가장 높다는 중학교 사회교과서만 보더라도 지구화의 문제를 경제적 영역으로만 환원하여 국가의 (경제적) 경쟁력 향상 문제로만 풀어내고 있다. 특히 최근 활발해지고 있는 정부의 공적개발원조(ODA)를 다룰 때도 지구촌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생존을 위한다는 인도주의적 관점보다는 이제 어느 정도 살게 된 우리의 위신의 확대로 조망하고 있다. 가장 적극적으로 사해동포주의를 고민해야 하는 사회교과서의 국제정치 단원에서조차도 이렇듯 과거 국가의 잔재에 묶여 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그토록 비난하고 있는 일본의 국가주의 혹은 보수주의 시각이 우리 교과서의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일본의 이쿠호샤 발행의 중학교 공민분야 사회교과서 국제정치 단원에선 우리 것과 여러모로 닮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교과서에서는 세계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여러 가지 역할은 사상(捨象)되지 않아야 하며, 동시에 강력한 국민의식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일본의 ODA도 국익 차원에서 새롭게 봐야 한다. 이 교과서에 따르면 국제관계는 항상 일본의 이익에 부합돼야 하는 정도에서 정립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교과서의 일본 내부에서의 채택률은 1% 미만이다. 반면 61% 이상의 채택률을 보이는 도쿄쇼세키의 교과서는 지구·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놀라울 정도의 사해동포주의를 강조한다. 일부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의 모든 사람의 행복없이 자신의 행복은 없다’는 교과서의 주장에서 그런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일본의 국가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우리는 내부적으로는 그와 동일한 국가주의를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그러고는 그것이 경쟁력 확보이며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살기보다는 나만 더 돋보이는 삶을 바라는 심성은 전 지구적 변환의 시대에도 나와 상관없다는 듯 여러 차원에서 그렇게 반복되고 있다.
부산외대 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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