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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끼니] 전병과 갈레트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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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9-04-10 19:47:42
  •  |  본지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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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인간과 음식의 만남에는 처음이 있기 마련이다. ‘처음’이란 어떤 음식을 최초로 맛 본 때가 아니라 그 음식의 진정한 맛과 의미를 처음 깨닫는 순간이다.
강원도 화천군 유촌식당의 도토리전병.
내가 전병과 처음 만난 건 4년 전이다. 강원도의 유명한 막국숫집을 갔을 때였다. 함께 갔던 일행은 당연하다는 듯 도토리전병을 시켰다. 거무튀튀한 색과 수더분한 생김새. 아무리 봐도 궁상스러웠다. 막걸리 안주 삼아 한 점 입에 넣었다. 도토리 가루를 묽게 반죽해 지진 전병이 보드랍게 씹혔다. 옅고 은근한 도토리 향이 차분하게 퍼졌다. 아삭아삭 씹히는 김칫소의 변주가 이어졌다.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맛이다. 입속에서 건더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생각되는 그 순간에 남는 쌉싸름한 맛은 자신의 존재를 끝까지 각인시키는 마지막 한 방. ‘전병이 이렇게 괜찮은 음식이었나’ 확인차 몇 번을 반복했더니 어느새 접시만 달랑 남았다. 나는 비로소 전병의 순정한 맛을 아는 몸이 된 것 같았다.

일본 소설가 모리 에토가 쓴 ‘블레누아’라는 소설이 있다. 소설은 프랑스 서쪽 끝 브르타뉴 지방의 브레튼이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궂은 날씨와 척박한 토양으로 밀농사조차 힘든 브르타뉴에서는 메밀이 주된 곡물이었다. 그들은 메밀을 빻아 갈레트라는 프랑스식 전병을 만들어 먹었다. 갈레트는 브르타뉴 사람들의 주식이자 척박한 땅을 일구며 살아온 의지를 상징하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주인공에게 갈레트는 가난하고 촌스럽고 낡음의 상징이었다. 고향을 떠난 주인공은 요리사의 길을 걷는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한참이 지나 파리의 유명 레스토랑의 주방장이 되어서야 그도 어쩔 수 없는 완고한 브레튼 출신임을 깨닫는다. 결국 귀향한 주인공은 식사를 제공하는 작은 민박을 운영한다. 민박에서 그가 브르타뉴의 맛으로 고객에게 선보이기로 한 음식은 그토록 싫어했던 갈레트. 제대로 된 갈레트를 만들기 위해 부모님이 경작하던 메밀밭을 찾은 주인공은 하얗게 핀 메밀꽃을 만난다. 그리고 소설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꽃을 손바닥 안에 감싸고, 작고 하얀 꽃잎을 헤아리고는 그대로 통곡해 버렸다.”

브르타뉴의 갈레트는 우리네 전병과 닮아도 너무 닮았다. 나는 전병의 맛을 알기 전에는 이 소설의 정서나 주인공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하얀 메밀꽃을 보면 그 속에서 슬픔과 강인함을 읽는 눈이 생겼다.
속초와 고성에서 발생한 산불로 주민들의 상심이 크다고 한다. 조기에 진화되긴 했지만 화마가 할퀸 상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고 심각했다. 불에 탄 자연을 복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척박한 땅에 뿌리내리며 하얀 꽃을 피우는 메밀의 강인한 생명력처럼 강원도민들 역시 이 시련을 반드시 극복하리라 믿는다. 그들에게 지지와 응원을 보낸다.

맛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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