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문명사에서 문자를 발명한 시점은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구분하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초기 인류가 동굴벽에 남긴 그림이나 다른 유물들이 아니라 우리가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역사’를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초기 문명권들 중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쐐기문자를 발명했고 이집트 문명은 비슷한 시기에 신성문자를 사용했다고 알려졌는데, 그렇다면 과연 문자를 발명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을까? 대답은 부정적이다. 실용적인 세계관을 신봉하던 메소포타미아의 슈메르 사람들은 상거래를 증명하거나 행정적인 기록을 남기는 데 문자를 사용했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문서들 중 가장 오래된 것도 기원전 32세기 정도에 이라크 남부 우룩(Uruk)에서 기록한 행정용 장부이다.
우리가 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 글은 좀 더 세월이 지나고 사회가 분화되어 ‘왕’에 해당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등장할 때 기록되었다. 초기 왕조시대라고 부르는 기원전 30~24세기에 와서야 건축물을 바치는 헌정문이나 전쟁 후에 세운 기념비와 같은 왕들의 이야기 즉 왕정문서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상대적으로 평등했던 시기에는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었는데, 권력과 부가 사회 구성원 중 일부에게 집중되기 시작하자 역사를 기록할 필요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그 사회의 지배층이나 최고 정치 지도자가 자신들의 지위와 지배를 확립하고 그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발전시켰다고 풀이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슈메르 왕명록’을 보면 왕권이 하늘에서 내려왔고 에리둑(Eridug)이라는 도시의 왕 두 명이 2만8000년과 3만6000년을 다스렸다고 기록한다.
역사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가감없이 기록한 글이며, 이 글을 통해 현재를 분석하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19세기에 들어와서 생겼다. 자연과학이 발전하면서 학문의 객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에 맞추어 역사학도 상상이나 추정을 배제하고 과거에 있었던 일을 있었던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경향이며, 원래 역사란 그 글을 기록하는 사람의 의도 또는 그의 역사관에 따라 과거에 있었던 일을 해석한 결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쓰거나 읽는 사람은 누구를 위해 그 작업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우리 사회 안에서 역사를 주제로 논쟁이 벌어지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다. 그럴 때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우리는 역사란 객관적으로 사실을 기록해야 한다고 전제한다. 그렇지만 역사 논쟁이 사료 비판이나 서로 연관되지 않은 사료의 교차검증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일부 사료만 사용하며 그 해석을 놓고 논쟁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런 논쟁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객관적인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것이 아닌 뭔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역사적 신빙성을 확인할 수 없는 사료를 기초로 우리 민족의 고대사가 좀 더 고대에 시작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왜 더 오래된 공동체가 자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는데, 그들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국민들을 하나로 묶어서 성취해야 할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이 땅을 지배하는 동안 근대화를 성취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그 성취의 열매를 누가 향유했는지 자세히 논의하지 않고 그들을 그늘 밑에 숨기고 있다. 제주에서 일어났던 4·3 사건은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도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데, 이렇게 철저하게 정보통제를 주도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음을 너무 잘 알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그 외에도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거나 건국절 논쟁을 주도하는 사람들도 대중적인 역사 이해를 전제로 깔고 특정한 정치적 의도를 관철시키려 한다는 사실에서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런 역사논쟁이 시대와 장소를 넘어 항상 있어왔던 일이므로 정당한 행위라고 인정해야 할까? 조금 다른 역사가 쓰여지기를 기대한다.
차별적인 개발정책 때문에 고향을 떠나서 도시 빈민으로 평생을 살았다면 그 역사를 써서 크게 읽고, 누구나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취직하고 일을 했는데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승진하지 못하고 퇴사를 종용 받았다면 그 역사를 노래로 써서 큰 소리로 부르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무런 선택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학교와 학원을 전전하며 살았는데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등 시민 취급을 받는다면 그 역사를 동영상으로 써서 인터넷에 올리자. SNS가 세상을 빠르게 바꾸고 있는 오늘, 정말 우리와 우리 이웃을 드러내는 역사를 써보자.
건국대학교 중동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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