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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칼럼] 또 다른 한류 ‘임을 위한 행진곡’ /정순백

홍콩 대규모 시위서 열창, 우산혁명 의미 담은 개사

아시아권엔 이미 수출돼 번안된 민중가요로 인기, 민주화 운동도 자산 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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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여 따르라.” 그의 연설은 항상 그렇게 들렸다. 20대 청춘에게는 명령처럼 느껴졌다. 더욱이 자기가 앞서서 나간다고 하지 않나. 그런데도 돌아서 가려고 하니 양심에 찔릴 수밖에. 살아 있어도 산 게 아닌 삶을 살 수 없는 게 피 끓는 청춘이 아닌가. 그래서 그의 연설을 듣는 날이면 뛰는 가슴을 부여안고 거리로 나서는 청춘이 많았다. 번개 머리에 한복차림의 카리스마, 열정적인 강연 모습, 대화하는 방식의 독특한 화법에는 거부할 수 없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부산 촌놈이 서울 대학로까지 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연설을 처음 들은 것은 32년 전 1987년 8월이었다. 그는 수산대학교(현 부경대)에서 열린 집회에 연사로 참석했었다. 6월 항쟁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당시 그의 연설은 대통령 직선제 쟁취라는 성취감에 취해 잊고 있던 시대정신을 되살리기에 충분했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날 그는 대통령 직선제를 군사정권과의 타협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기억한다. 미완성의 항쟁이라는 것이다. “통일의 그날까지 싸우자.” 희미한 기억 속의 그 날 연설을 그의 화법으로 결론 내리면 이렇지 않았을까.

그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불린 민중가요는 아마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를 청춘으로 보낸 많은 이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라는 첫 노랫말을 들으면 지금도 가슴속에 무엇인지가 꿈틀할 것이다. 이 노래 가사의 원작자가 백 소장이라는 사실은 수산대 연설 때 알았다. 그는 ‘YM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서대문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1980년 12월에 지은 장편 시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의 일부가 가사라고 했다. 소설가 황석영 씨는 백 소장의 장편 시 일부를 노랫말로 다듬어 붙였고, 작곡은 전남대 학생 김종률 씨가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1년 황 씨와 광주 지역 노래패 15명이 공동 제작한 노래극 ‘넋풀이-빛의 결혼식’의 마지막 합창곡이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7년 이후 집회 때마다 불리면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고 대표적인 민중가요가 됐다. 1997년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승격되면서 기념곡으로 선정돼 제도권에 진출했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때 공식 식순에서 제외되고 제창되지 못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신분(?)이 다시 복원됐다.

이런 ‘임을 위한 행진곡’이 한류에 한몫을 한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다. 최근 홍콩의 시위 현장에서 이 노래가 울려 퍼졌다는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범죄인 인도 법안’ 제정에 반대하는 홍콩 어머니들의 지난 14일 집회에 이 노래가 등장했다. 뭉클했다. 여성 참석자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광둥어와 한국어로 부르는 장면이 유튜브에 생생하게 담겨 있는 게 아닌가. 이 참석자는 “광주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노래다. 영화 ‘변호인’ ‘택시운전사’ ‘1987’ 등을 본 홍콩인은 이 노래를 잘 알 것이다”라는 배경 설명까지 했다. 그날 시위대는 흥얼거리며 노래를 따라 불렀고 ‘산 자여 따르라’라는 마지막 부분에서는 환호성이 터졌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번안곡 제목은 ‘우산 행진곡’이다. 2014년 홍콩 행정장관의 완전 직선제 등을 요구하며 79일 동안 벌인 대규모의 민주화 시위인 ‘우산 혁명’을 기리며 개사된 것이다. ‘우산 혁명’은 당시 시위대가 경찰의 물대포와 최루액 등을 우산으로 막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아시아권 집회 현장에서 불린 게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중국에서는 노동자 쟁의 때 이미 등장했고, 태국 말레이시아 대만 캄보디아 등 동남아 곳곳의 민주화 운동 현장에서도 현지어로 불리고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수출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퇴진 운동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 ‘우산 행진곡’을 부른 그는 “2017년 100만 명의 한국 사람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할 때 이 노래를 불렀다”고 말했다.

그래 맞다. 민주화 운동도 한류 열풍을 피해갈 수 없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앞서서 나갔다.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고속 성장이 만든 그늘을 민주화 운동으로 지우는 과정에서 정국도 안정시킨 우리의 소중한 경험은 여러 나라에 좋은 선례가 됐을 듯싶다. 그런 측면에서 민주화 운동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 자산으로 여겨진다.

백 소장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안팎에서 히트(?)를 쳤는데도 “나는 이 노래에 대한 소유권도 저작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미 이 땅에서 새날을 기원하는 모든 민중의 소유가 됐기 때문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백 소장다운 처세다. 그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사람들 마음속에 노랫말의 의미가 온전히 살아남는 그 자체였을 테니까.

논설위원 sbjun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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