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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다 보면 /김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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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9-09-05 19:39:57
  •  |  본지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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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몹시 바쁘다. 해야 할 일들이 가을 태풍처럼 몰려오고 있다. 늘 겪는 일이지만 바쁜 일은 꼭 떼로 달려든다. 또 늘 겪는 일이지만 미리 대비하는 것은 언제나 불가능에 가깝다. 9월이 닥치자마자 할 일이 넘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여름 동안 준비할 수 없었다. 그때는 그때대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 여러분, 졸업시험과 과제와 논문준비로 몹시 바쁠 예정이니 아낌없는 지원과 협조 부탁드립니다.”

9월이 시작된 지난 일요일, 비 내리는 저녁에 배달음식을 앞에 둔 식구들에게 대놓고 요청을 하였다. 진작부터 확실하게 가사분담을 하고 있는 식구들에게는 ‘이번 학기에 나는, 내가 맡은 집안일을 등한시할 것이니 다들 그렇게 알고 각자의 역할을 더 늘려주기 바랍니다’로 들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모두 항의의 목소리를 내는 대신 동정의 눈빛을 보내준 것은 항간에 떠도는 대학원생들의 고생담을 익히 들어 알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작년 초, 대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 팔순을 넘긴 엄마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셨던지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인자 학교에 가서 공부하마 뭐하노?”하고 물으셨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타당한 물음이었지만, 나로서는 얼른 답이 안 나왔다.

나는 공부를 해서 뭘 하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고, 공부 자체가 바로 ‘뭐’였기 때문이었다. 공부와 거리가 꽤 먼 대학 시절을 보낸 후, 나는 늘 뭔가 미진한 것에 내 발목을 잡히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몇 차례 대학원을 가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다가 드디어 기회가 와서 공부를 시작한 것이었다. 엄마의 물음에 나도 곰곰이 생각한 끝에 대답했다. “엄마, 공부 안하마 또 뭐하노?”

공부를 한 걸 가지고 세상에 나가 무엇을 해야 한다? 나에게 그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현대문학, 그중에서도 어린이·청소년 문학을 공부해서 돈을 벌거나 이름을 얻는 게 가능할까? 어리고 젊은 학생들은 당연히 배운 것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하게 되겠지만, 나는 그런 꿈과 희망은 전혀 없다. 공부한 걸 수단으로 돈을 벌 생각도 없고 다른 득이 생길 가능성도 없다. 다만, 한창 해야 할 때 못했던 공부를 지금이라도 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앎의 폭을 넓혀가고 싶을 뿐이다.

누구는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이미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돈이 되지 않아도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는 사람들은 차고 넘친다. 그렇지 않다면 공공 도서관, 주민 센터, 새마을금고 같은 데서 무엇 때문에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겠는가.

대학마다 평생교육원을 운영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는가.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배우고 싶은 걸 배울 뿐이다. 다만 조금 강도 높은 교육기관을 선택했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를까. 아무튼 나에게 명절이 낀 올해 9월은 너무 빡빡하다. 게다가 논문 지도 교수는 내가 낸 계획서를 보고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진단을 내렸다. 시험이 있다고 과제 제출 날짜를 조정해주는 일 같은 건 꿈도 못 꾸게 한다. 그런 엄정함은 오히려 통쾌하다.

그렇다면 엄청난 속도로 몰아치는 태풍 같은 일을 내가 잘 헤쳐갈 수 있을까? 그렇다. 나는 그럴 것이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서 도로 청소부 베포가 일찌감치 그 방도를 가르쳐주었으니까.

“얘, 모모야. 때론 우리 앞에 아주 긴 도로가 있어. 너무 길어.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 같아’ 이런 생각이 들지. 그러면 서두르게 되지. 그리고 점점 더 빨리 서두르는 거야. 허리를 펴고 앞을 보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 같지. 그러면 더욱 긴장되고 불안한 거야. 나중에는 숨이 탁탁 막혀서 더 이상 비질을 할 수가 없어. 앞에는 여전히 길이 아득하고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야.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 돼, 알겠니?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계속해서 바로 다음 일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그러면 일을 하는 게 즐겁지. 그게 중요한 거야. 그러면 일을 잘 해낼 수 있어. 그래야 하는 거야.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다 보면 어느새 그 긴 길을 다 쓸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겠고, 숨이 차지도 않아. 그게 중요한 거야.”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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