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빛깔이 궁금했다. 손을 내려다보니 살색이고, 그 속의 피를 생각하니 빨강이다.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니 검정이고, 씨앗을 보니 자주색이다. 개나리를 보니 노랑이고, 쌀밥을 보니 하양이다. 눈을 들어 가을산을 보니 생명은 만 가지 색이다. 온갖 단풍의 색이 밀려와 눈앞이 아찔하다. 여름의 자리에 가을이 찾아와 인기척을 한다. 색감이 꽃피는 가을이다. 세상의 모든 나무가 빛깔 바꾸기에 한창이다. 은행나무는 노란 물을, 참나무는 갈색 물을 잎 위에 올리느라 분주하다. 머지않아 도심 길가에 늘어선 플라타너스의 넓은 잎사귀에도 갈색 기운이 선명하게 오를 것이다. 아직 단풍물이 채 오르지 않아 초록 그대로인 잎도 눈에 띄지만, 모두가 가을맞이 기색만은 또렷하다. 지난 계절 동안 이 땅의 모든 생명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이어온 노동의 수고를 내려놓고 낙엽은 길 위에 차곡차곡 쌓이고, 다시 또 천천히 빛깔을 바꿀 것이다. 노랗고 붉던 잎들이 회갈색으로 하나되어 길 위에 나뒹굴며, 가을은 그렇게 땅속 깊이 스며든다.

긴 여름이 지나고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이즈음은 나무들에게 가장 바쁘고 힘겨울 때다. 꼼짝 않은 채 해만 바라보고 서 있는 나무지만, 분명 그들은 누구보다 요령 있게 가을을 맞이해야 한다. 한 해의 결실을 더 알차게 보아야 할 뿐만 아니라, 다가올 추위에 맞설 채비까지 갖춰야 한다. 재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눈에 띄는 빨간 단풍 빛의 이유가 그렇다. 나뭇잎에는 여러 가지 색깔을 띠는 성분이 있지만 봄부터 여름까지는 초록빛만 선명하다. 초록빛을 가진 엽록소가 나무의 자양분을 만들어 내는 동안 다른 빛깔을 가진 요소들은 엽록소 뒤에 감추어지는 까닭이다. 나무는 초록으로 이 땅의 모든 생명을 살리기 위해 봄부터 가을까지 온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제 가을이다. 나무는 제 몸에 남은 물을 덜어내야 한다. 양분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했던 물이다. 물이 남은 채로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줄기 속의 물관이 얼어 터질 수 있다. 자칫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잎과 잎자루 사이에 떨켜층(abscission zone)이라는 새 조직을 만드는 건 그래서이다. 떨켜층은 잎에서 만든 양분이 다른 조직으로 옮겨가지 못하도록 할 뿐 아니라, 뿌리로부터 물이 전달되는 걸 막는다. 물이 없어 광합성을 할 수 없어진 엽록소가 쉬어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엽록소가 활동을 멈추면 자연스레 엽록소의 초록빛에 눌려 있던 다른 빛깔들이 드러난다. 나무마다 성분에 차이가 있어서 노랗거나 붉거나 갈색이거나 가지각색이다. 은행나무나 아카시아처럼 노란색을 띠는 나뭇잎에는 카로티노이드라는 성분이, 단풍나무나 화살나무와 같이 빨갛게 물드는 잎에는 안토시아닌이 많다.

나무는 잎 위에 안토시아닌을 충분히 끌어 올려 붉게 물들었다가 며칠 지나면 예쁘게 물든 단풍잎을 뿌리 부근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다시 또 얼마 지나면 땅 위에 내려앉은 낙엽이 언제 붉었는가 싶게 회갈색으로 바짝 마른다. 잎 위에 머물렀던 안토시아닌 성분이 모두 흙 속으로 스며든 것이다. 흙에 스며든 안토시아닌이 지어내는 붉은빛에는 겨울을 준비하려는 나무의 비밀이 담겨 있다. 안토시아닌은 강력한 항산화 효과를 내는 물질로 해충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한다. 물도 양분도 없이 생명 활동을 줄여야 하는 나무가 겨울잠을 자는 무방비 상태에서 해충의 공격을 막아낼 채비를 하는 것이다. 잠을 자면서도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제 몸에 가지고 있던 해충 방제 요소를 뿌리 부근에 살며시 내려놓는다. 엄동설한에 살아남기 위한 간절한 생존 전략이다.

오래 바라본다고, 가만히 생각한다고 어찌 나무의 속내를 알 수 있겠는가. 재촉하는 나무의 가을 채비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도통 알 수가 없다. 시간에 담긴 나무의 노동과 수고를 떠올리며 나무의 힘겨운 애옥살이를 더 깊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계절, 가을이다. 선선해진 바람에 서걱거리는 풀 위로 떨어지는 순한 햇볕 한 줌이 어느 새 따뜻하게 느껴지는 시간. 한여름의 뜨겁던 태양빛과 비바람을 견디고 제 자리에서 몫을 다한 살아남은 것들의 마지막은 아름답고 위대하다.

부산대 생명과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