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세계은행은 동아시아 국가의 높은 저축 성향과 물적 투자, 인적 자본 투자로 인해 고도 성장을 이룩할 수 있다고 했다. 동아시아의 기적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뉴욕타임스’ 경제 칼럼니스트이자 저명한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 등은 한국이나 싱가포르의 경제 성장은 물적 투입을 통해 이뤄진 것이며, 이것은 양적인 효과를 나타낼 뿐 질적 효율성을 담보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월드뱅크와 크루그먼 간에 동아시아 경제의 혁신 능력에 대한 이견은 존재하지만, 두 입장이 공통으로 합의하는 내용이 있다. 둘 모두 경제성장 과정에서 물적 투입 역할에 주목한다. 한국은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물적 투자를 통해 경제 성장을 이끈 대표적 나라다. 1990년대 전투적 노조주의 성장과 함께 임금이 가파르게 오르는 국면에서도, 1997년 이후 외환위기 이후에도 한국 기업의 투자 성향은 줄어들지 않았다. 대기업은 임금상승에 직면해 생산 자동화와 사내하청 등 비정규직 확대를 통해 비용 인상에 대응했다.

2006년 이후에는 생산 공정에서 로봇 사용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2017년 현재 한국은 인구 만 명당 로봇 사용 대수, 즉 로봇 밀도가 경쟁국들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높다. 설비자동화는 두 가지 효과가 있었다. 하나는 노동의 ‘숙련 축적’에 의존하지 않고도 노동생산성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다. 설비에 체화된 기술을 활용해 노동자의 숙련 의존도를 낮추었던 것이다. 공장자동화는 전투적 노조주의로 유명한 노동자 운동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측면에서도 사용자의 구미에 맞는 선택이었다.

이를 두고 노동과정 연구자들은 ‘숙련 배제적 성장’이라고 표현한다. 기업은 노동과정에 대한 노동자의 자발적 참여를 늘리고 숙련을 통해 기술 노하우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화를 통해 숙련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노동통제를 강화했다. 공정효율은 친기업적 엔지니어의 몫이었다. 조립라인을 관리하는 역할은 엔지니어에게 맡기고 노동자는 그저 단순반복적 노동만 하도록 최적화됐다. 엔지니어들은 사용자와 동맹을 맺은 셈이다.

대기업 노동자는 생산자동화에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음으로써 숙련 배제적 성장에 무관심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자동화되어도 일자리만 없애지 않는다면 반대하지 않았다. 대신 노동자들은 생산성 상승에 따른 산출 증가 시에는 임금인상 투쟁을 통해 자신의 몫을 챙겼다. 노동과정에 대한 사용자의 통제를 수용하는 대신 실질임금 상승을 통해 이를 보상받는 방식이었다. 임금인상에 대한 노동자의 요구 증대, 생산혁신에 대한 노동조합의 적대적 태도는 사용자들로 하여금 숙련 배제적 성장을 더욱 부추기도록 했다.

2014년 이후 정부 주도의 스마트공장 건설은 생산 공정 자동화 수준을 크게 높였다. 스마트공장 건설이 전통적 의미의 생산자동화는 아니지만 현재 진행되는 초급 단계의 스마트시스템 도입은 공정자동화와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스마트공장 체제를 성공적으로 도입한 중견기업, 중소기업은 노동생산성 상승, 매출액 증가율 동반 상승을 기록하고 있다. 매출액 증가는 생산을 늘리도록 해 고용마저 늘리는 효과를 낳았다.

스마트 공장 도입 확대는 2000년대 대기업들의 공장자동화 과정을 상기시킨다. 과거에도 그랬듯 현재 이뤄지는 중견기업, 중소기업 스마트 공장 도입이 노동자 참여나 노동조합과의 협력 속에서 이뤄진 사례는 거의 없다고 보고된다. 공장 스마트화는 공정 혁신, 제조 혁신 측면에서 사용자 측 계획에 따라 이뤄지는 것일 뿐 노동자의 자발적 참여, 노동의 스마트화를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사용자 가운데는 스마트 시스템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 능력 향상은 기업 산출 정보가 노동에게 유출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친기업적인 엔지니어들에게 스마트 공정을 관리하도록 함으로써 그와 같은 우려를 제어하려 한다. 노동조합은 노동조합대로 스마트화된 노동에 적응하기보다 이에 적대적이다. 공장 스마트화가 행여 일자리를 감소시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이다. 양측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21세기에도 한국 생산현장에서 숙련 배제적 성장은 현재진행형이다.

경남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