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호숫가 숲길을 걸었다. 장마 기간이라 먹구름 가득했고 가랑비가 내리다가 그쳤다. 우산을 들고 걷다가 우연히 김훈 작가님을 만났다.

“저 나무 이름이 뭐예요?” 나는 물었고 선생님은 “백양나무죠”라고 대답하셨다. 선생님의 ‘산책코스’를 따라 나는 묵묵히 안 가본 길을 걸었다. 길가 흰 돌멩이가 달의 운석처럼 보였다.

한 번의 직접적 만남도 없이 한 학기가 지나가고 있다. 학생들이 이번 주말까지 기말과제를 제출하면 나는 성적 채점을 할 것이다. 학생들은 온라인 강의를 통해 선생 얼굴을 봤는데 방학을 맞는다. 어쩌면 따로 떨어져 별다르지 않게 하루의 밥을 먹고 웃고 울고 느끼는 일들에 적응했을지도 모른다. 부단히 대면하면 일어나는 어떤 섬광, 예상치 못한 파문, 전환점들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야 하는 지금 여기에서 얌전히 지내지만은 않았으면 좋겠다.

“역사가는 ‘일어난 일’을, 시인은 ‘일어날 법한 종류의 것’을 다룬다”고 아감벤이 말했다. 2016년에 내가 미국에서 사유지에 발을 들여놓으려는데 친구가 황급히 말린 경험을 시로 쓴 적이 있다. 라일락 만발한 아름다운 정원에 있는 고양이를 가까이서 보려다가는 총에 맞아 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진짜 직접 보는 것보다 노트북 바탕화면으로 보는 라일락 정원이 훨씬 정취가 있을까?



“나는 그럴 리 없다는 말을 매일매일 한다. 차차 더 크게. 어제는 강남역에서 소리쳤다. 가슴속에서 불타는 바위가 흰 재가 될 때까지. 머리 위로 떨어지는 사람들을 피해가며.

내가 한 발짝만 더 그 정원에 접근했다면, 버지니아 주의 사우스밴드에서 나는 그 집 남자가 쏜 총에 맞아 합법적으로 죽었을지 모른다. 몇 안 되는 주민이 아니므로 늙은 흑인에게도 일어났던 일.

실제로 만나는 것만이 제대로인 만남인 시대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야. 실물로 오가는 세계는 끝난 걸까? 마지막 낭독회일까?” ( 김이듬 시 ‘마지막 미래’ 일부)



올해 책방에서 낭독회가 줄줄이 취소되었다. 그러다가 지난달 중순에 다시 호흡 가다듬고 첫 콘서트를 열었다. 코로나19의 확산이 확연히 줄어든 시기였으므로 새로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책방의 책무인 양, 주민들에게 문학과 예술을 통해 희망을 전하고 싶었다. 콘서트 제목은 “우리는 다시 만났다”였다. 정민아 씨가 우정과 연대의 마음으로 두 시간 동안 가야금을 뜯으며 노래했다.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한 고통뿐만 아니라 깨달음에 관해 대화도 나눴다.

책방 인근의 서울, 파주, 인천에서 온 이들과 멀리 군산에서 온 이도 있었다. 예상보다 길어진 자가격리와 고립으로 인해 지친 표정들이 밝아졌지만 어떤 분들은 눈물을 흘렸다. ‘사람의 시간’ ‘지구의 봄’이라는 연주를 들으며 씻기는 느낌으로 치유의 시간이었다며 고백하는 이도 있었다. 우리는 마스크를 쓰고 거리를 둔 채 자신과 타인이 공존하고 있는 자리에서 확장된 만남의 의미와 새로운 질서를 느꼈다.

대체 이런 답변이 어떻게 가능할까? 부드러운 목소리로 너그러운 말씀을 들려주실 줄 알았는데, 문득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는데. “어머니, 별고 없으시죠?” “너는 내게 별고가 있기를 바라니?” 유머치고는 무서웠다. 나는 오른팔을 허공에 저으며 아니라고 거듭 대답했다. 통화는 금방 끝났다. 어머니가 부재하는 상황 속에서 내내 허우적거리며 살아온 나날들이 떠올랐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이혼하셨고 어머니는 목회자가 되어 혼자 40여 년을 살아오셨다.

내가 대학생이 되어 처음 어머니를 찾아갔을 때도 어머니는 내 서툰 사랑의 인사를 조금 왜곡하셨다. 내가 전혀 아무 것도 바라는 바 없이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언어는 불완전하다. 마음을 전하려면 자주 만나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니 지독한 그리움과 서운한 심정이 의심을 동반하여 삐딱하게 나오나 보다.

한 나라에 사는 모녀지간도 이러한데, 70년간 만나지 못한 가족들은 어떠할까? 남과 북으로 흩어져 그리움에 발을 동동 구르며 늙어가는 이들이 10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지구상에 국경을 경계로 가족이 이산되어 소식조차 알 수 없는 민족이 또 있을까? 모든 정치적 논리를 떠나서 우리는 만나야 한다.

시인·책방이듬 대표·한양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