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좋아하고 따랐던 채현국(경남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 선생님이 지난 2일 돌아가셨다. 휴일 오후에 양산 개운중학교에 마련된 추모 분향소에 다녀왔다. 빗방울 사이로 얼마 남지 않은 벚꽃잎이 흩날리며 봄날이 가고 있는 교정을 둘러보니 선생님과 이곳에서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라 더욱더 쓸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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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현국(오른쪽) 효암학원 이사장과 장현정 호밀밭출판사 대표가 양산 효암고 ‘쓴맛이 사는 맛’ 비석 앞에 서 있다. |
내가 선생님과 인연을 맺은 건 2014년 봄이었다. 그해 한겨레신문 신년호에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나는 그 기사를 읽고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고무돼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에서 선생님을 직접 뵐 수 있었다. 그날 선생님은 우선 학교를 좀 보여주고 싶다며 교정 이곳저곳을 구경 시켜 주셨다. 직접 만들고 심고 가꿔놓은 연못이며 옥수수, 꽃, 나무를 보며 그 하나하나의 내력을 얘기할 때 신이 난 표정은 정말 아이 같았다. 선물로 준비한 과자와 내가 쓴 책을 한 권 내밀자, “책 쓰는 사람이오? 학교 선생이오?” 하고 물으시면서 “에이, 그럴 줄 알았으면 안 만날 걸, 나는 선생 별로 안 좋아하오”라며 그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셨던 것도 기억난다. 말씀 편하게 하시라고 했을 때, 정색하시며 “우리는 원래 나이나 서열 상관없이 서로를 높여 불렀소. 장 선생도 후배들에게 그리하소. 앞뒤 없이 반말하고 서로를 낮게 칭하자는 것은 일제 문화요. 나는 그런 것은 몸에 맞지 않아요”라고 하셨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이후로도 가끔 선생님이 계신 양산에 찾아가 산책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에는 근처 ‘다와’라는 술집에 가서 생맥주를 마시곤 했다. 그 술집은 마침 내가 잘 아는 후배 부부가 운영하던 곳으로 선생님이 가끔 혼자 찾아가 술을 마시던 단골집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당신의 인생은 형의 자살 이후 180도 바뀌었다는 이야기, 젊은 나이에 막장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을 휘어잡으며 사장 노릇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는 이야기 등 살아오신 얘기도 듣고 “사람은 머리가 복잡해야 살아있는 거고, 삶은 그 맛이 쓸 때 더 깊어지는 것”이라는 어른의 지혜도 새겨들었다. 돌아보면 순간순간이 매번 복되고 귀중한 시간이었고 늘 시간이 모자랄 만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해 여름, 나는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LIG문화재단 계간지 ‘인터뷰’에 싣기도 했다.
2017년 9월에는 서울 녹색병원에 입원해계신 선생님을 뵈러 가기도 했다. 비 오는 새벽, 한 시간 남짓 선생님이 탄 휠체어를 밀며 면목시장도 한 바퀴 돌았다. 요즘 뭐 공부하느냐 물으시며 동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던 게 특히 기억난다. 병실로 돌아와 선생님을 침대에 눕힌 다음 몸 구석구석을 닦아드렸는데, 선생님은 그사이 아이처럼 입을 조금 벌리고 곤히 잠드셔서 나는 그 표정을 한참 바라봤다. 그해 면목시장에서 새벽 3시에 맞았던 가을비를 잊지 못한다.
사상이나 지식을 너무 믿지 말라고, 사람은 지식으로 사는 게 아니라 심보로 살아야 한다던 말씀. 작은 체구지만 걸음걸이가 씩씩하고 말할 때마다 얼굴과 몸 전체를 움직이며 다양한 표정을 지으셨던 이 시대의 거인. ‘어른’이라는 말의 무게가 땅에 떨어져 조롱거리가 된 시대에, 역설적으로 새로움과 젊음에 대한 강박적 집착을 발로 차버리고 진짜 어른의 품위와 지혜를 느끼게 해주신 고마운 분. 만날 때마다 머리와 가슴이 상쾌해져서 늘 보고 싶었던 분. 시시하고 묵묵하게 살아가는 일의 진가를 확인해주시고 늘 용기를 북돋워 주신 분. 사람은 계몽이 아닌 어울림의 대상임을 몸으로 깨닫게 해주시고, 부끄러운 시절에 돈 많이 번 것이 무슨 자랑이냐면서도 그 돈으로 아낌없이 우리 현대사 곳곳을 조용히 받쳐주신 분.
지난 6년 남짓, 선생님과 보냈던 시간을 돌아보며 새삼 그 크고 깊은 뜻을 가만히 헤아려 본다. 마음에 품은 소중한 인연이 다시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세상이 너무 쓸쓸하게 느껴진다. 깊고 깊은 감사의 마음과 함께 선생님께서 편히 잠드시길 소망한다.
호밀밭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