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소크 생물학 연구소’. 11명의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가 근무한 세계적인 연구시설이다. 1966년 완공된 이곳은 과학 못지 않게 건축학적 명성도 높다. 비움의 미학을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한 20세기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연구동과 실험동 사이 드넓은 마당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이 텅 비어 있다. 그 마당에는 푸른 하늘이 담기고, 맑은 햇살이 노닐고, 싱그러운 바람이 쉼 없이 불어온다. 누구나 찾아와 자유롭게 거닐고 쉴 수 있는 공존의 공간이다. 건축가 승효상은 “방문하는 이들의 주장과 관념에 의해, 거주하는 이들의 삶의 모습과 그들의 변하는 기쁨 노여움 사랑 즐거움에 의해 채워지고 또 비워진다”고 했다.

소크 연구소에 깃든 비움의 미학은 건축주인 조너스 소크(1914~1995)의 철학과 일치한다. 그는 1955년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했다. 소아마비는 1952년 미국에서만 3145명의 사망자와 2만1269명의 다리 마비자가 발생할 만큼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백신 개발로 소크는 돈방석에 앉을 기회를 만났다. 제약회사에 특허를 양도했다면 70억 달러(8조 원)를 벌었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태양에도 특허를 낼 것인가”라고 반문하며 소아마비 백신 제조법을 무료로 공개했다. 백신은 태양처럼 모두가 누려야 할 공유재산이라는 얘기다. 그 덕분에 소아마비를 퇴치할 수 있었다. 소크 연구소는 20세기 최고의 사색적 건축가로 불리는 루이스 칸의 작품이다. 그는 멕시코 건축가 루이스 바라간의 도움을 받아 마당을 설계했다. 바라간은 “완벽히 비운 이 마당은 두 건물(연구동과 실험동)을 결합시켜 그를 통해 바다의 수평선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칸과 바라간의 비움과 소크의 공존철학은 수평선에서 하나가 됐다.

아쉽게도 소크 이후로는 백신 공유를 볼 수 없다. 백신은 아니지만, 최근 미 제약회사 머크(MSD)가 코로나19 경구용 치료제 ‘몰누피라비르’의 특허를 공유키로 한 게 그나마 눈에 띄는 반전이다. 머크는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사태를 긴급상황으로 지정하는 동안 특허 공유에 따른 로열티도 받지 않기로 했다. 몰누피라비르는 임상시험에서 확진자의 입원·사망률이 50%가량 줄어드는 약효가 확인됐다고 한다. 특허를 공유해 다른 제약회사가 복제약을 생산할 경우, 머크가 한 세트에 700달러(82만 원)로 책정한 몰누피라비르 가격을 10달러 미만으로 낮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중·저소득 국가들에게는 단비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중·저소득 국가들이 코로나를 극복하긴 어렵다. 화이자 모더나 등 제약회사들의 백신 제조 기술 공유가 필요한데, 이들과 유럽연합(EU) 영국 등 주요 국가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 백신 지적재산권 보호를 규정한 ‘무역 관련 지재권 협정(TRIPs)’의 특정 조항을 일시 유예하는 협상이 세계무역기구(WTO)에서 타결되려면 164개 WTO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동의해야 한다. 그러나 지재권 보호 유예에 찬성한 나라는 60개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고소득 국가의 백신 접종률은 70%를 넘었지만 저소득 국가는 3%에도 못미친다. 백신 양극화는 글로벌 상품 공급망 교란과 인플레이션을 야기한다. 글로벌 기업의 제조 공장이 밀집한 개발도상국의 백신 접종률이 낮아 공장 가동 중단이 속출한다. 화물선 선원 역시 다수가 개도국 출신이어서 격리나 출입국 제한 등으로 화물 운송에 큰 차질을 빚고 있다. 2022년 중반까지 백신 60% 접종에 실패하면, 2022~2025년 개도국의 국내총생산(GDP) 손실은 2조3000억 달러(2700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선진국의 피해까지 합치면, 향후 5년간 전 세계의 GDP 손실은 5조3000억 달러(6200조 원)로 예상된다. 크리스티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거대한 백신 격차를 줄이지 않으면 인류의 비극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백신 공유를 통한 공존 도모가 최선의 해법이다. “자국의 미접종자에 대한 접종뿐 아니라 모든 나라의 백신 접종률을 함께 높이지 않고는 방역 상황의 안정적 관리와 완전한 일상 회복이 어렵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로마 G20회의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모두의 손실을 알면서도 백신 격차를 줄이지 않고 사익만 고집하는 건 어리석다. 불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과 다를 바 없다. 승효상은 소크 연구소 기행에서 이런 심리를 “물신의 탐욕”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의 근원을 다시 물을 수 있도록 비워진 곳, 그런 비움의 도시가 결국 우리의 존엄성을 지킨다”고 했다. 코로나의 원인도 탐욕에 있다. 좀 더 많이, 보다 빨리 가지려는 압축성장의 탐욕이 위기를 불렀다. 탐욕을 비우지 않고는 위기 해결은 힘들다. 비움과 공존이 화두다.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