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불어 수업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선생님은 ‘갑자기’라는 표현을 가르치기 위해 ‘tout a coup: all of sudden’이라고 뜻을 영어로 썼다. 나는 ‘sudden’ 앞에 ‘a’가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들어가도 되고 안 들어가도 된다”고 했다. 평소에 얌전하며, 성적도 우수한 한 친구가 말했다. “하려면 똑바로 합시다.” ‘뚜따꾸’ 교실은 폭력의 현장으로 변했다. 그 말을 한 친구는 불려 나가 구둣발에 짓이겨졌고, 또다시 화살은 나에게로 향했다. “너도 나와!” 질문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야만의 시대의 한 단면이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만약 ‘학생인권조례’란 것이 당시에도 존재했다면, 어찌 그런 폭력이 난무할 수 있었을까?

김석준 전 부산시교육감이 이룬 성과는 지워질 위기에 처했다. 혁신학교, 청렴교육, 그리고 학생의 인권 신장을 위한 노력 등등. 지난 7월 1일 자로 하윤수 신임 부산시교육감이 임기를 시작했다. 자칭 보수 교육감의 시대가 열렸다. 그의 취임 일성은 “공교육 1차 목표인 기초학력을 튼튼히 하고 평가를 통한 정확한 진단과 맞춤형 교육을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일제고사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로 읽힌다. 초3부터 고3에 이르기까지 전수 학력평가를 실시하겠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교실은 성적으로만 한 줄 세우기 현장이 될 것이며, 이에 뒤질세라 부모들은 사교육에 매달릴 것이다.

만 20년을 학원장으로 일했으며, 사교육의 폐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필자로서는 학생과 학부모의 시름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두 딸을 기르고 있는 아버지로서 한숨이 난다. 큰딸을 외고에 보내기 위해 과외와 학원으로 돌려야 했다. 그리고 소위 ‘인 서울’을 했다. 특목고 전문 어학원을 경영하며 건진 것이 큰딸이 ‘인 서울’ 한 것이라면, 잃은 것은 나의 일자리와 아내였다. 지금 작은딸은 과외는커녕 학원도 보내지 못한다. 부모 찬스를 쓸 수 없는 형편에 있으니 말이다. 단지 ‘문화 자본(cultural capital)’이라는 형태의 보이지 않는 자본은 작은딸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영어영문학과 사회학을 전공한 아빠를 자신이 쓸 수 있는 자본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중2 첫 중간고사에서 혼쭐이 난 결과다. 기말고사에서는 자신의 페이스를 찾아가는 듯해서 마음이 놓인다.

흔히들 부산의 경제와 교육을 ‘동서 격차’라는 말로 특징짓는다. 지역적으로 부산의 동쪽은 학생 성적이 서쪽보다 높다. 여기서 동쪽은 해운대구 수영구 동래구를, 서쪽은 사하구 사상구 북구를 주로 지칭한다. 이 말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학생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말이다. 즉 사교육-특목고-수도권 대학-대기업 취업-고소득의 연쇄를 통해 부모의 숟가락이 대물림된다.

그런데도 하 교육감은 서부산권에 특목고 설립을 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우려할 일이다. 수월성을 목표로 한 교육적 선택이며, 교육 약자를 염두에 두지 않은 잘못된 판단이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겐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신화가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다. 모든 것을 성적으로 환원하고, 그 성적은 성공이라는 신화로 연결된다. 평가에서 좋은 성적을 받은 아이는 ‘자기 계발’이라는 장치를 통해 성공의 열쇠를 거머쥐려고 한다. 그러나 좋지 않은 성적을 받은 학생은 자기 통제도 제대로 못 하는 ‘찌질이’로 자신을 책망하고 만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루저’로서 자신의 지위에 만족하고 말거나 퇴출된다.

이런 현실은 교육부가 2020년 정책연구과제로 ‘교육체제가 고등학교 서열화 및 계층화와 어떤 관련성을 갖고, 교육을 통한 불평등에 어떻게 작용해왔는가’를 통계적으로 검증한 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연구 결과를 보면 월평균 가구소득이 700만~1000만 원인 가정의 학생 중 3.5%가 특목고에 진학하지만, 100만~300만 원인 가정의 학생 비율은 1.4%에 불과했다. 부모의 직업이나 학력도 자녀의 고교 진학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아버지 학력이 대학원 이상인 가정의 자녀 중 4.8%가 특수목적고에 진학했다. 대졸이 2.4%, 고졸이 1.1%였다. 학교가 ‘구별 짓기(La Distinction)’의 현장이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