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판교는 ‘한국판 실리콘밸리’로 불린다. 넥슨코리아부터 SK케미칼까지 ‘꿈의 직장’ 1697곳이 입주했다. 이중 60% 이상이 IT 기업이다. 생명과학(BT)과 CT(문화콘텐츠기술) 업종 비율도 각각 13%에 달한다. 판교 1·2테크노밸리에서 발생하는 연간 매출액은 지난해 109조9000억 원. 전국 1000대 기업(2020년 기준)에 포함된 부산 기업의 총매출액 27조9280억 원보다 4배 많다.

더 부러운 건 ‘속도’다. 판교 입주기업 연간 매출액은 2011년 5조 원에서 10년 새 20배 이상 증가했다.

부산도 ‘제2의 판교’를 꿈꾼다. 지난 7월 부산시가 공개한 부산진구 범천동 철도정비단 개발계획은 ‘4차 산업허브’에 맞춰져 있다. 전체 24만3206㎡ 중 65% 이상을 IT와 문화콘텐츠·업무 공간으로 만들어 디지털·바이오산업과 창업을 육성한다는 계획. 센텀2첨단산업단지(195만㎡)의 모델 역시 “남부권 대표 ICT 융합 창업 허브”다.

과연 센텀2·범천기지창은 판교가 될 수 있을까. 매출액 기준 전국 상위 300대 ICT 기업에 포함된 부산 기업은 5곳(2019년 기준)에 불과하다. 부산상공회의소는 “ICT 산업의 핵심은 청년 인재다. 그들이 원하는 비즈니스·정주·문화·교육 환경부터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판교의 성공비결도 인재 확보다. 판교 테크노밸리 연구인력은 상시근로자의 37.7%(2016년 기준)에 달한다. 국내 최고 수준이다. 박재율 지방분권전국회의 공동대표는 “서울 강남에서 판교까지 지하철로 15분 걸린다. 수도권 인재가 모이는 이유” 라고 분석한다. 반면 대기업은 ‘인재 부족’을 탓하며 비수도권 이전을 꺼린다.

결국 부산이 ICT허브가 되려면 대기업을 유치하거나 스스로 사람을 키워야 하는데 어느 것 하나 녹록지 않다. 인재 산실인 지역 대학은 국·공립마저 정원 미달에 시달린 지 오래다. 교육부에 따르면 비수도권 대학은 2025년까지 정원 1만4244명을 감축한다. 수도권 대학 1953명의 7.3배에 달하는 규모다. 교육정책도 수도권 위주다. 정부는 “반도체·디지털 인력 100만 명 양성을 위해” 수도권 대학 정원 규제 완화를 추진한다. 학령인구는 감소하는데 수도권 정원이 늘면 비수도권 대학의 소멸이 한층 빨라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1990년대부터 시행된 수도권 공장총량제(제조업 공장 면적을 총량으로 관리)도 무력화될 처지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5일 공장총량제 미집행 물량을 수도권 기업에 나눠주는 ‘제2차 경제규제 혁신안’을 발표했다. 당장 경기도에 전기차 생산라인 확대를 추진하던 기아차는 4000억 원을 투자해 공장 신·증설에 나설 것으로 알려졌다. 균형발전을 촉구하는 강원·영남·호남·제주·충청권 시민사회가 최근 성명을 내고 “경제 위기를 빌미로 수도권 규제 완화를 졸속 추진하는 것은 헌법에 명시된 균형발전 의무를 포기하는 위헌 행정”이라고 비판한 이유다. 앞서 정부는 평택·용인 반도체단지의 사회기반시설(SOC) 구축을 지원하는 한편 용적률도 350%에서 490%로 올렸다. 수도권 자연보전권역 내 공장 신·증설 면적도 확대했다.

반면 비수도권 SOC 건설 속도는 더디다. 최근 국토교통부는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기준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예산 낭비를 방지한다”는 이유인데 지방정부는 비상이 걸렸다. 문재인 정부 시절 120조 원대였던 예타 면제 사업이 감소하면 지역이 가장 큰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김두관 의원에 따르면 2015~2020년 정부의 예타를 통과하지 못한 SOC 사업의 77.8%는 비수도권 사업이었다. 서울·경기의 통과율이 높은 것은 인구가 집중돼 경제성 평가에서 유리한 탓이다.

윤석열 정부의 6대 국정목표 중 하나인 ‘지방시대’도 구호만 난무할 뿐 컨트롤타워가 보이지 않는다. 정부는 최근 자치분권위원회와 국가균형발전위원회를 합쳐 ‘지방시대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분권과 균형발전을 통합해 종합적으로 다루겠다는 방향성은 맞다. 문제는 지방시대위의 위상이다. 시민사회에서 요구한 ‘실행력을 갖춘 부총리급 독립 부처’가 아니라 자문위원회로 규정됐기에 정부 정책을 조율할 권한이 없다.

부산울산경남 특별연합(메가시티)도 중앙정부의 무관심 속에 내년 1월 출범이 미지수다. 산업은행 부산 이전은 말만 무성할 뿐 기약이 없다. 이쯤되면 부산·울산시장과 경남도지사가 대통령실 앞에서 1인 시위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규제 완화를 내세워 수도권 초집중을 부추기면 대한민국이 망한다” “지역이 위기인데 한가하게 영빈관 건립에 헛심 쓸 시기냐”고 따져야 할 판이다.

인구소멸 위험 시·군·구는 2015년 33곳에서 2021년 106곳으로 무려 3배 증가했다. 매년 부산을 떠나는 청년은 1만 명에 달한다. 인재가 다 떠나면 ‘부산형 판교’에서 누가 일할까.

이노성 디지털부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