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호 시인은 “억새는 달빛보다 희고, 이름이 주는 느낌보다 수척하고, 하얀 망아지의 혼 같다”고 했다. 경남 양산 천성산(千聖山) 화엄벌의 억새를 보면 생각나는 말이다. 25만 평의 화엄벌에선 매년 이맘때면 은빛 억새의 군무가 펼쳐진다. 바람과 햇빛에 몸을 맡긴 채 자유롭게 일렁이는 억새는 집착에서 벗어난 선승을 닮았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 화엄벌의 전설이 실려 있다. 천성산에서 수도하던 원효(元曉)대사가 어느 날 중국 당나라 장안을 투시하니, 종남산 운제사 대웅전의 대들보가 썩어 무너지고 있었다. 대웅전에서 예불을 드리던 1000여 명의 승려가 대들보에 깔리기 직전이었다. 원효는 즉시 판자에 ‘해동원효척반구중(海東元曉擲盤救衆)’이라고 적어 운제사를 향해 던졌다. 판자가 운제사에 이르러 대웅전 앞뜰 공중에서 맴돌자, 승려들이 이를 보기 위해 모두 대웅전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 대웅전이 폭삭 무너졌다. 글뜻대로 바다 동쪽 신라의 고승 원효가 판자를 던져 자신들을 구한 것이다. 이에 감동한 1000여 명의 승려가 신라로 건너와 화엄벌에서 원효의 가르침을 받고 모두 성불했다고 한다. 해탈한 듯 하얀 억새는 승려들의 화신인지도 모르겠다.
이 가을, 탈속의 자유를 만끽하는 억새가 천성산 화엄벌에만 있겠는가. 영축산 신불산 간월산 고헌산 가지산 재약산 운문산 등 해발 1000m 이상 높이의 산 7개가 밀집한 영남알프스의 억새도 화엄벌 못지 않게 장관이다. 억새 군락지의 전체 면적이 215만여 평으로, 국내 최대 규모다. 창녕 화왕산 정상 6만여 평의 분지에 빼곡한 억새는 흰 솜이불인 듯 부드럽다. 해발 900m 능선을 따라 이어진 합천 황매산 억새평원은 크기가 축구장 60개(18만여 평)에 이를 정도로 광활해 구름바다를 보는 듯하다. 정상 연대봉에서 구정봉까지 4㎞ 능선에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물결치는 전남 장흥 천관산의 억새는 또 어떤가.
억새는 타고난 도인이다. 자신을 비우고 바람, 햇빛과 혼연일체가 되는 게 대지를 더욱 아름답게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안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놓을수록 중력의 지배에서 풀려난 공기처럼 자유로워진다는 것도 억새는 깨닫고 있다. 그 각성은 한낮에 은빛으로 반짝이던 억새가 저물녘 스러지는 햇살 아래 온몸이 황금색으로 빛날 때 절정을 이룬다. 억새의 성불이다. 억새는 그렇게 자신이 존재하는 곳을 극락정토로 만들어 간다. 억새가 빚어내는 가을의 전설이다.
이경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