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월요일은 최고 기온 섭씨 34도의 매우 무더운 한여름 날씨였다. 가까운 사람끼리 서로 전하는 인사마다 다가올 무더위를 은근히 걱정스러워하기도 했다. 올해도 여느 여름처럼 너나 할 것 없이 삼복더위를 피해 시원한 계곡으로, 바다로 떠날 모습이 상상이 된다.
이렇게 더위를 피해 시원한 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피서(避暑)’라고 한다. 피서는 중국 후한(後漢)시대 역사서 ‘한서(漢書)’를 저술한 반고의 선자시(扇子詩 ·부채에 쓴 시)에서 처음 유래된 말이다. 2000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의 오장육부 하나 변한 게 없으니, 더위를 피하고 싶은 마음은 똑같았으리라 넉넉히 짐작된다. 그렇다면, 그 옛날 사람들은 과연 어떤 피서법을 찾고 택했을까 궁금해진다. 그래서 조선시대 지성인의 표본이자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피서법을 찾아보았다. 선생은 1824년 ‘여유당전서’에서 ‘소서팔사(消暑八事·더위를 사라지게 하는 8가지 일)’라는 멋진 시를 남겼다. 간략히만 전하면, 첫째 송단호시(松壇弧矢·소나무단에서 활쏘기), 둘째 괴음추천(槐陰鞦遷·홰나무 그늘에서 그네 타기), 셋째 허각투호(虛閣投壺·빈 누각에서 투호 놀이), 넷째 청점혁기(淸簟奕棋·시원한 대자리에서 바둑 두기), 다섯째 서지상하(西池賞荷 ·서쪽 못에 핀 연꽃 감상), 여섯째 동림청선(東林聽蟬 ·동쪽 숲에서 매미 소리 듣기), 일곱째 우일사운(雨日射韻·비 오는 날 운자 뽑아 시 짓기), 여덟째 월야탁족(月夜濯足·달밤에 물에 발 담그기)이 그것이다.
선생의 피서법을 살펴보니, 한여름 해운대 백사장에서 북적이는 많은 사람 사이에서 더위를 피해 해수욕을 하는 피서법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고요하고 한가롭고 여유롭다. 정적이면서도 동적이다. 혼자이면서도 함께 즐긴다. 몸과 정신의 활동이다. 시원한 바람이 느껴진다. 더위를 피함(避暑)과 동시에 더위를 극복함(克暑)이 느껴진다.
그중에서도 나는 ‘월야탁족’에 눈길이 갔다. 탁족은 산간 계곡의 물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쫓는 행위를 말한다. 이는 단순히 피서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수양의 한 방법이기도 하다. ‘탁영탁족(濯纓濯足)’이라는 한자성어에서 나왔는데, 그 기원은 ‘맹자’ 이루상(離婁上) 편에 실려 있다. 맹자가 이르기를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탁하면 내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고 하였다. 즉 창랑의 물이 맑으면 맑은 대로 갓끈을 담가 씻고 창랑의 물이 탁하면 탁한 대로 발을 담가 씻는다는 뜻으로, 물이 맑거나 탁하거나 모두 다 제 쓰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행운과 불행 역시 그것을 대하는 내 생각과 처신에 달려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나아가, 사람이 살면서 맞닥뜨리는 행운과 불운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세속에 얽매이지 않으며 초탈한 삶의 방식으로 확대 해석된다.
이쯤 되니, 피서는 단순히 더위를 피하는 것이 아니었고, 극서는 단순히 더위를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름마다 맞는 극심한 무더위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는, 인간이 극복해야 할 자연현상이다. 그런데 인간이 극복해야 할 것이 자연현상뿐이랴? 복잡하고 어려운 인간관계의 한 단면, 첨예하게 대립되는 사회생활의 한 단면, 그 끝도 모르면서 성공하고자 맹목적으로 경쟁하며 달려가는 삶의 한 단면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지금 필요한 것은 ‘탁영탁족’이 아닐까 싶다.
문득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을 이번 주말에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도 잘 모르면서 막연히 무엇인가 대단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꼭대기의 끝도 보이지 않는 높은 기둥에 기필코 오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서로 밟고 밟히며 오르는 수없이 많은 애벌레 무리들을 뒤로 하고, 그들을 떠난 ‘노란 애벌레’가 결국 ‘나비’가 되어 꽃들에게 희망을 전한다는 이야기이다. 나도 노란 애벌레처럼 나비가 되어 꽃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다산 선생처럼 ‘월야탁족’을 하면서 무더위로 은유되는 삶의 희로애락을 초탈하는 마음 수양을 하리라 다짐해본다. 그것이 피서(避暑)이자 극서(克暑)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