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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세이] 실리콘밸리의 아버지가 고민한 것은?

송성수 부산대 교양교육원 교수·융합학부 과학기술혁신전공 겸직

  • 송성수 부산대 교양교육원 교수
  •  |   입력 : 2024-01-08 19:41:18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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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는 반도체의 주원료인 ‘실리콘(규소)’과 계곡을 뜻하는 ‘밸리’가 합성된 용어이다. 지리적으로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만의 남부 일대를 포괄한다. 실리콘밸리의 첫 기업은 휴렛팩커드(HP)이고, 첫 반도체 업체는 쇼클리반도체다. 두 회사는 모두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레더릭 터먼(Frederick Terman, 1900∼1982)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휴렛과 팩커드는 터먼의 제자들이었고, 쇼클리는 터먼의 지인이었다. 터먼이 1970년에 미국조사단의 단장으로 한국에 파견되어 한국과학원(현재 카이스트)의 목적 규모 운영 방식 등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터먼은 팔로알토에 소재한 스탠퍼드 대학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쳤다. 학부에서는 화학을 전공했고 석사는 전기공학으로 받았다. 스탠퍼드 대학이 오늘날에는 최상위급 대학이지만 20세기 전반만 해도 20위권에 머물렀다. 터먼은 더 훌륭한 교육을 받기 위해 MIT의 박사과정에 등록했다. 미국 서부에서 동부로 이동한 셈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마치 부산 출신이 서울로 간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MIT에서 터먼을 지도했던 인물은 10살 연상의 부시(Vannevar Bush)였다. 부시는 전기공학으로 박사를 받은 후 기업체에서 라디오를 연구하다가 1919년에 MIT 교수가 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과학연구개발국의 의장을 맡아 맨해튼 계획을 포함한 전시연구를 관할했다. 부시는 1945년에 ‘과학, 끝없는 프런티어’라는 기념비적인 보고서를 발간했는데, 그것은 20세기 후반에 미국을 비롯한 선진 각국이 과학기술정책을 추진하는 기초로 작용했다. 부시와 터먼의 활동을 새겨보면 ‘용장 밑에 약졸 없다’는 경구가 생각난다.

터먼은 1924년에 박사를 받은 후 이듬해에 스탠퍼드 대학의 전기공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동부 지역의 대학에 남을 수도 있었지만 모교로 돌아오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스탠퍼드 대학의 발전에 대한 그의 철학은 ‘첨탑 건설’이었다. 성장 가능성이 높은 몇몇 분야를 선택해 첨탑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터먼은 물리학과 교수들과 협동하여 전파공학에 대한 연구와 교육에 집중했다. 학생들을 이끌고 지역 업체를 방문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으며 기업체의 엔지니어들을 대학으로 불러들여 세미나를 열었다. 터먼은 학생들에게 동부 지역의 업체에 취업하는 대신 스탠퍼드 대학 부근에 창업할 것을 독려했다. 이에 휴렛과 패커드는 1938년에 음향발진기를 개발한 후 이듬해에 팔로알토의 허름한 차고에서 휴렛팩커드를 설립했다. 회사명을 놓고 두 사람이 동전 던지기를 했는데, 승리한 팩커드가 휴렛팩커드를 선택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터먼은 1944∼1958년에 공과대학 학장, 1955∼1965년에 교무처장을 맡았다. 1951년에는 스탠퍼드 산업단지(현재의 스탠퍼드 연구단지)를 조성하여 첨단기술 분야의 기업을 유치하는 데 적극 나섰다. 스탠퍼드 대학은 장기간의 임대 기간과 저렴한 임대료를 내걸었고, 배리언 연합, 제너럴 일렉트릭, 모토롤라 등이 산업단지로 몰려들었다. 1955년에 터먼은 팔로알토 출신으로 벨연구소에서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쇼클리를 끌어들였다. 1957년에는 쇼클리반도체에 근무하던 ‘8인의 배신자들’이 페어차일드를 설립했고, 1968년에는 노이스와 무어가 페어차일드에서 나와 인텔을 차렸다. 8인의 배신자들이 만든 새로운 기업은 65개에 달했으며, 이를 매개로 스탠퍼드 산업단지는 반도체산업이 집적된 거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실리콘밸리’라는 용어는 1971년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뉴스’에 실린 기사를 통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오늘날의 스탠퍼드 대학과 실리콘밸리에는 터먼의 고민과 리더십이 배어 있다. 수도권의 유혹을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터먼, 선택과 집중으로 대학을 발전시키려 한 터먼, 산학협동과 기술창업의 길을 연 터먼, 대학 주도로 산업단지를 만들어 기업을 유치한 터먼…. 시공간은 다르지만 현재 부산이 풀어야 할 매듭처럼 느껴진다. 부산의 터먼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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