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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중세의 가을, 국화꽃 잔치

고려 중양절 잔치 필수품…노인성 질환 약재로 사용

사회적 약자엔 추위 혹독…여야 민생 챙기기 경쟁을

정은정 부경역사연구소 연구원

  • 정은정 부경역사연구소 연구원
  •  |   입력 : 2024-11-20 18:50:22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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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름 끝, 짧은 가을. 그 끝자락에 혹독한 추위가 기다리고 있다. 긴 겨울을 위한 채비가 절실해진다. 가을은 음력 7·8·9월이다. 그 중 음력 9월 9일은 가을과 겨울의 경계이자 음기가 왕성해지는 중양절이다. 3월 3일 상사절에 강남에서 날아온 제비가 중양절에 돌아간다. 상사절 모란 꽃 본 후 씨앗을 받아다 중양절에 화분에 심는다. 때문에 상사절과 중양절은 쌍을 이룬다.

중양절은 중세 동아시아에서 매우 귀히 여긴 속절이다. 동한 때 앞날을 예측하는 도사 비장방이 항경에게 ‘9월 9일에 큰 난리가 날 텐데, 수유꽃(열매)을 담은 주머니를 메고 높은 산에 올라가 국화술을 마시면 난을 피할 수 있다’고 했다. 중양절 등고, 국화술 마시기, 수유꽃 꽂기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려는 벽사 의미를 띤다.

신라 시절부터 중양절에는 왕과 신하가 술자리 모임을 가졌다. 고려 현종 선종 대에는 송 탐라 흑수말갈 상인이 이 날짜에 맞춰 내왕했다. 한식 단오 중추 중양에는 역대 임금을 모신 경령전에 보고하는 절차를 따로 두었다. 이 날은 관리들이 하루 쉬었다. 고려에서 비중 있던 중양절은 조선에 와서 대내외적 위상이 크게 줄어 명일(이름있는 날)에서 제외된다.

그 변화의 시작은 고려말이다. 중양절은 추석에 미처 수확하지 못한 곡식을 마무리 짓는 절기이다. 중양절의 변동은 일단 작물의 품종과 생산, 수확 주기와 밀접하다. 대개 수확된 주곡 작물은 관인의 녹봉으로 충당되었다. 고려 관인이 녹봉을 지급받는 날짜는 음력 1월 7일(인일) 7월 7일(칠석) 두 차례였다. 당시는 보리 재배가 주축을 이루면서도 추수 곡물로 쌀 생산량도 높아지던 때이다. 고종 6년 영주 부석사 길흉축월횡간 고려목판에 좁쌀 콩 보리 모시 깨 쌀이 함께 나온다. 우왕때 왜구는 낙동강 인근 경상도에서 보리를 약탈했다. 밀양에서는 5~6개 이삭이 달린 보리를 상서로운 물품으로 여겨 국왕에게 바쳤다. 그때까지도 민에게 쌀은 낯선 곡식이었다.

보리 수확시기는 늦은 6·7월이다. 7월 칠석에 지급된 녹봉의 주곡은 보리였다. 7월 칠석비가 내려야만 보리가 마르지 않는 데다 연이어 쌀의 ‘때맞춘’ 수확도 가능했다. 추위로 쌀 낟알이 여물지 못하면, 8월을 지나 9·10월이 되어야 걷이가 가능해진다. 쌀의 추수감사절은 8월 추석이 아닌 9월 중양절이었다. 이 무렵 중양절은 겨울 채비를 해야 하는 ‘약속된 시간’이었다. 국왕은 혹독한 추위에 민의 부역 동원을 금지하거나, 옥에 갇힌 수감자를 배려해 사면 조치도 취했다. 국가를 지키는 군인과 사회적 약자에게는 따뜻한 겨울옷을 나누어 주었다.

혹독한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는 국화꽃은 중양절 잔치의 대표적 필수품이다. 대부분의 꽃이 봄에 피는데 국화는 한랭한 겨울 언저리에 핀다. 국화의 국은 그해 꽃의 구극, 한해 중 마지막에 피는 꽃이라는 어원을 가진다. 일찌감치 가야의 김해 예안리 무덤의 주인공은 죽어서는 국화꽃 무늬 벨트를 허리춤에 찼다. 백제 16대 진사왕은 청 황 백 적 흑의 5가지 국화종자를 일본에 전해주었다.

향약구급방부터 이어지는 동의보감에는 국화꽃을 씹거나 말린 잎을 베개로 삼길 권한다. 의약 기술이 턱없이 부족하던 중세, 국화는 노인성 질환이나 풍증을 다스리던 용도로 쓰였다. 노란 국화는 음양오행의 한가운데 중앙 토를 상징한다. 성리학적 이해가 깊어지는 고려말의 지식인은 중양절에 노란 국화를 더욱 애호했다. 수유꽃 열매도 중양절 필수품이다. 산수유는 아열대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이다. 오염된 물에 산수유를 풀어서 음용하면 전염병을 막을 수 있었다. 오수유는 추운데서도 잘 자라며 강장 효과가 뛰어나다.

중양절에 등고 국화술 수유꽃에는 약간의 서사가 담겨 있다. 등고 행위는 널리 인정과 덕치를 베풀어야 한다는 이념에서 출발한다. 국왕은 장수와 건강에 효과가 좋다는 국화술을 중양절 잔치에 노인에게 드린다. 혹독한 추위를 잘 견디시라는 격려의 의미가 깃들어 있다.

고려말 이후 조선 전기에는 중양절의 국화 잔치를 양로연으로 지정했다. 중양절의 양로연에 해당하는 고려 노인잔치는 ‘노인사설의’이다. 잠시 주춤하던 노인사설의는 희종 충렬왕대에 노인을 공경하자던 본래 취지에 맞춰 재개되었다. 노인에게는 돌봄이(시정)도 배속했다. 시정의 지급은 처음 80세 이상 고령자만 대상으로 하다가 차츰 60세로 저변을 넓혀갔다.

아득한 1000여 년 전, 사회적 약자를 포함한 고려의 노인 정책은 촘촘했다. 국왕은 국가 원로와 노인을 스승 삼아 그들을 적극 예우했다. 재난마저 유독 약자에게만 돌아가는 요즈음. 혹독한 추위를 앞둔 이때야말로 노인과 사회적 약자에 대해 두텁고 섬세한 대책이 절실하다. 여야 할 것 없이 정쟁은 그만두고 이젠 민생을 좀 돌아봤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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