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국민을 충격에 빠트린 비상계엄이 휘몰아친 2024년 연말도 며칠 남지 않았다. 다가올 2025년 새해는 육십갑자(六十甲子)로 뱀의 해 을사년(乙巳年)이다. 우리 말에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이 있다. ‘소름끼치고 스산한 분위기’를 의미하는 이 말은 1908년 출간된 이해조의 신소설 ‘빈상설’의 글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1905년 국권상실의 민족적 비극 ‘을사늑약’을 빗댄 ‘을사년쓰럽다’는 표현이 어원이라는 것이다. 가슴 아픈 의미를 담고 있는 탓일까. 2025년을 앞둔 한국 사회는 글자 그대로 을씨년스럽다.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날 밤 대학 친구와 집 근처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굴지의 재벌 계열사 최고경영자(CEO)인 친구는 전날 40년 다니던 직장을 퇴직했다고 털어놨다. 동창들 사이에선 환갑을 넘어 경영인을 역임한 그가 ‘고래심줄’로 불렸다. ‘실적 탓’이었다. 공시를 보면 그의 회사 올해 실적은 수십 년 만에 가장 나빴다. 술기운이 오른 친구는 우리나라 상당수 기업들이 앞으로 더 문제라고 넋두리했다.

비상계엄이 경제에 미친 충격은 극심하다. 경제계에서는 재벌 위기설까지 오간다. ‘삼성 위기설’부터 ‘롯데 위기설’이 언론에 등장했다. 이들 외에도 상당수 상위권 재벌들이 사업·재무적 위기설에 휩싸여 있다고 한다. 불과 두 해 전만 해도 사상 최대 실적을 경신했다며 호들갑을 떨던 그들이었다. 대체 두 해 사이에 한국 경제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돌이켜보면 한국 재벌의 위기설은 팬데믹이 끝나가던 2022년 하반기부터 제기됐다. 첫째 이유는 미국을 필두로 전 세계가 인플레이션 완화를 위해 앞다퉈 금리를 올린 것이었고, 둘째는 산업의 무게 중심이 빠르게 전기차 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으로 옮겨간 것이었다. 이런 상황 변화에 국내 기업들이 대응하지 못한 게 위기설의 출발이었다.

고금리는 가뜩이나 부채가 많은 상당수 한국 기업들의 호실적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실제 2020년과 2021년 상위 10대 재벌의 영업이익과 당기순익이 평균 5%를 넘었다. 하지만 고금리가 본격화된 2022년과 2023년의 영업이익은 4% 안팎인데 순이익은 평균 2%에 못 미쳤다. 물건을 팔아 번 이익보다 더 많은 돈이 이자를 갚는데 쓰였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도 2023년 영업이익은 20조 원이 넘었지만 당기순익은 10조 원 적자였다. 상위 100대 기업 중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는 좀비기업도 스무 곳이 넘었다.

왜 이런 상황이 초래됐을까. 가장 큰 원인은 한국 대기업의 대응 부재였다. 기업이 고금리시대에 살아남으려면 최대한 악성부채를 줄이고 성장추구형 투자를 해야 한다. 하지만 2022년 이후 현시점까지 대기업의 비유동성 악성부채는 되레 늘었다. 부채증가의 가장 큰 이유는 부동산·자사주 매입과 같은 사실상 묶인 자산의 증가였다. 10대그룹의 부동산 보유액을 보면 연평균 3%가 넘는다. 공시지가 상승이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부동산 보유량도 계속 증가했다. 반면 연구개발(R&A) 투자액은 거의 변동이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재벌들의 경제상황 판단 실수다. 팬데믹 종식 이후 미국 증시가 폭등하자 경기회복으로 착각했다. 산업 경쟁력 강화는 미뤄두고 증시 활황기를 틈타 돈 잔치에 몰두했다. 팬데믹 시기에 반짝 부상했던 비대면 유통사업이나 테슬라 붐을 탄 2차 전지사업에 너도나도 뛰어든 것이 전부였다. 그 사이에 한국 경제를 떠받쳐온 반도체 철강 화학 자동차 같은 핵심 제조업 경쟁력은 약화됐다. 인공지능 로봇 같은 첨단사업에 뒤늦게 뛰어들었지만 경쟁자인 대만에도 한 발 처졌다.

2025년 한국 경제를 위협하는 가장 큰 변수는 관세전쟁을 예고한 트럼프 정부의 정책이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로선 최악의 시나리오다. 우리 기업들은 이미 7년 전 대중무역 갈등과 관세폭탄을 경험한 트라우마가 있다. 여기에 비상계엄 사태와 탄핵정국 여파는 우리 경제를 악몽의 소용돌이에 빠트릴 수 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불법계엄을 막아내고 민주주의를 회복한 우리 국민의 놀라운 저력이 있기 때문이다.

밤이 깊어갈수록 아침은 더 가까워지기 마련이다. 희망고문을 해보지만 이래저래 을씨년스런 2024년 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