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삼국지’를 왜 읽는가? 혹자는 난세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그 생존의 처세술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방대한 분량이지만 누구든 삼국지를 읽어보라는 권고를 받았을 것이고 한 번은 읽기에 도전했을 것이다. 정치학이나 경영학을 전공하는 학자들도 리더십을 연구하는 차원에서 이 고전을 탐독하기도 한다. 실제 기업을 경영하는 분들은 이상적인 최고경영자(CEO)의 역할을 알기 위해 이 책을 찾는다고 한다. 이런 대중적 인기와 수요 때문에 그동안 많은 출판사에서 삼국지에 대한 여러 종류의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한때 삼국지가 논술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 있어서 유명 작가의 번역본을 청소년들이 많이 보기도 했다.

워낙 유명한 책이어서 삼국지에서 유래된 고사성어 또한 많다. 그중에서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말이 특히 유명하다. 꼭 필요한 인재를 초빙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고 몇 번이라도 찾아가서 설득하는 성의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유비(劉備)가 남양(南陽)에 은거하고 있던 제갈량(諸葛亮)을 집으로 세 번이나 찾아갔다. 처음 방문했을 때 제갈량은 집에 없었다. 다시 찾아갔을 때에도 그는 집에 없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세 번째로 찾아갔을 때 마침 제갈량이 집에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래서 유비는 뜰 아래 서서 기다렸다. 뒤척이다가 한참 후에 잠에서 깨어난 제갈량은 집에 있던 동자에게 왜 손님이 왔는데 깨우지 않았느냐고 했지만, 사실 그는 자는 척하고 있었다. 봄날의 잠에서 깨어난 제갈량은 최대한 예의를 표하면서 함께 일하자고 제의하는 유비가 백성을 근심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자기와 같음을 확인하고 의기투합하게 된다.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은 국보로 지정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그린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이다. 예전에 21장의 그림이 들어있는 그의 화첩이 독일에서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고, 방송국에서도 특집을 편성해서 보도했다. 그 화첩에는 금강산 그림도 있지만 옛 이야기 속의 인물이나 사건을 묘사한 ‘고사인물도’가 또한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는 초당을 세 번째 찾아간 유비가 제갈량이 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 있다. 그 그림에는 ‘봄날 초당에서 잠을 잔다’는 뜻인 초당춘수(艸堂春睡)라는 제목이 있다. 이 말은 제갈량이 잠에서 깨어나면서 읊은 20자의 시(詩)의 일부이다. 삼국지의 묘미는 주요 장면마다 나오는 시를 읽는 것인데, 현대의 독자들은 이런 시가 어렵게 느껴져서 다만 그 스토리 전개에 흥미를 가질 뿐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제갈량의 시에 나오는 초당춘수를 잘 알고 있었는데 근래에는 이 말을 언급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정선의 이 그림으로 인해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삼고초려는 꼭 필요한 인재를 초빙하기 위해 세 번 집으로 찾아간다는 성의를 강조하는데 초점이 있고, 역시 같은 뜻이지만 초당춘수는 자기를 찾아온 사람의 절실함과 진실함을 시험해보는 과정이다. 그런데 꼭 이런 방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한가?

‘주역’의 몽괘(蒙卦) 오효(五爻)에 대한 정이천(程伊川 1033-1107)의 역전(易傳)에는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다. “어진 자가 아래에 있으면서 어찌 자청해서 먼저 인군에게 자리를 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옛사람이 인군이 예의와 공경을 갖추기를 기다린 다음에 초빙에 응하는 것은 스스로 높고 위대해지기를 원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대개 덕 있는 사람을 존경하고 도를 즐기는 수준이 이런 정도가 아니면 더불어 일을 이루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맺어진 유비와 제갈량과 같은 정도의 진실한 만남이 지금도 가능할까?

먼저 몸을 굽히고 자리를 구걸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던 조선시대 선비들은 자신들도 제갈량처럼 자존감 있는 인사로 대우받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 희망 사항을 정선에게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다. 초당춘수는 재야에서 고결하게 인격과 실력을 닦은 선비들이 자기를 알아줄 그 사람이 찾아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소망을 그린 그림이다. 그러면서 또한 자신들도 제갈량처럼 처신하겠다고 다짐하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삼국지가 감동을 주는 고전으로 여전히 사랑을 받는 것은 단지 생존이나 승리를 위한 권모술수를 배울 수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에 더하여 유비와 제갈량이 그랬던 것처럼 초당춘수의 절차를 거쳐서 뜻을 합한 다음에는 죽음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는 우정과 의리의 인간관계를 끝까지 유지한 사례를 소설에서라도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 그런 만남을 염원했던 선비들의 꿈을 정선은 완벽하게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