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 다음날, 진료실을 찾은 분들이 평소보다 불안해 보였다. 특히 5월의 광주를 직접 겪은 어르신은 환한 낮인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누군가 ‘탄핵 트라우마’를 말하지만 나쁜 기억은 트라우마가 아니다. 진짜 트라우마는 이런 것이다. 끔찍한 사건을 경험한 시점의 막다른 골목, 그 절대적인 무기력 상태로 기습당해서 어르신의 현재는 1980년 5월에 포획되었다.

계엄의 밤에 나는 어떤 기시감이 들었다. 올해 4월, 정부로부터 고발당했다. 보이스피싱이 아닌지 의심했지만 ‘업무방해 방조’라는 혐의였다. 의사 커뮤니티의 익명게시판에 쓴 짧은 글이 조사 대상이었고, 경찰이 커뮤니티를 압수수색해서 익명의 나를 특정했다. 사실 그 글은 칼럼 “의대 증원, 정부 태도와 전공의 사직 이유”(2월 23일 자 국제신문 시사난장)와 다를 바 없다. 왜 나를 고발했을까? 아마 조회 수 3만 회 때문일 것이다. 현역 의사 세 명 중 한 명이 읽은 수치, 그렇다고 그게 전공의 사직을 선동한 근거가 되나? 서울에서 조사관 두 명이 왔고 피의자로 4시간에 걸쳐 조사받았다. 총선 전날이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두려웠다. 경찰 조사가 두려운 게 아니라, 권좌에 앉은 대통령이 생각보다 위험한 인물일지 모른다는 두려움.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는 것만큼 분명한 독재의 징후는 없다.

우리들 중에 누가 위험한 인물일까? 이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위치에 따라 위험인물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가령 일반 범죄는 공격성이 강한 분노 조절의 장애가 위험하지만 연쇄살인범은 무감동(apathy),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자가 더욱 위험하다. 그렇다면 위험한 권력자는 누구일까? 자기 확신의 세계에 갇혀 권력을 휘두르는 자라고 생각한다. 의심하지 않고 확신하는 자. 그런 사람은 사실을 믿지 않고 믿고 싶은 걸 사실로 믿는다. 주술이나 음모론을 즐기는 오타쿠 기질은 개인 취향일 뿐이다. 대화가 안 통하고 융통성이 없지만 주변을 잘 챙기는 평범한 이웃으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권력의 자리에선 매우 위험하다.

자기 확신이 강할수록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발언 시간의 대부분을 독점하고 반대 의견은 입을 틀어막고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킨다. 소통하지 않는 고집은 아집에 불과하다. 주변에는 권력을 탐하는 아부꾼들만 남아 “좋아요”를 남발한다. 차이가 사라지고 동일성만 남은 터널 비전의 세계, 의심의 공간이 질식하면 자기 확신의 세뇌로 이어진다. 그림을 미리 그려놓고 힘으로 때려 맞추는 식이 반복된다면? 역사는 그런 사람이 권좌에 올랐을 때 얼마나 위험한 일이 벌어지는지 수많은 예시로 보여주었다.

계엄 담화문은 사회적인 현실과 심리적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현실 검증력의 손상이 우려되지만, 궁지에 몰려 국면 전환용 극단적인 카드를 꺼내는 절박함은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망상한다. 돈키호테도 절박해서 풍차를 공격했다. 거대한 악당으로 보이는 풍차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그렇다고 비상계엄을 해도 되나? 우리 사회에는 합법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과 협치의 길이 존재한다. 억울하고 화난다고 동네 모임 날 막걸리에 독약을 타도 정당화될까?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느 정도 ‘관용’을 보여야 한다는 마음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오바마의 말이다. 공감의 파이프라인이 막힌 권력자는 여론을 무시한다. 총선 참패와 낮은 지지율도, 국민 87%가 계엄의 잘못을 지적해도, 확신의 세계는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에게만 충성한다는 뜻이 아닐까. 모든 걸 상대 탓으로 돌리는 정신승리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희한한 담화로 마무리된다. 그래서 사과할 줄 모른다. 계엄 선포를 사과한 게 아니라 겁을 줘서 놀랐다면 미안하다고 말할 뿐이다. 헌재의 판결이 어떠하든 결코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객관화 능력이 없는 확신은,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처단이란 단어를 쓰는 ‘격노하는 권력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청소년에게 화를 내며 훈계하는 건, 윤리 선생이 아니라 어릴 적 양아치였거나 내면에 불량스러움을 가진 자다. 자신이 부정하고 싶었던 면을 타인에게서 발견했을 때 화를 내고 혐오한다. 한때 노무현을 존경하고 학창 시절 모의재판에서 전두환에게 사형을 구형했던 전직 검사는, 요즘 소셜미디어에서 ‘윤두광’ 밈이 유행하는 걸 어떻게 받아들일까? 노무현을 닮고 싶지만 전두환 닮은 꼴로 희화화되는 자신을 돌아볼 용기가 있을까. 집회에서 응원봉을 흔든 청년들은 대개 정치적 단체와 무관하다. 나와 다른 생각에 저항하는 게 아니라,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힘으로 억압하는 ‘앵톨레랑스’(intolerance)에 저항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