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 며칠 몇 주 계속 남쪽으로 갔다. 단둘이서 끈질기게. 생살이 드러난 구릉지. 알루미늄 주택들. 가끔 재생림의 헐벗은 줄기들 사이로 저 아래 뻗은 주간 고속도로가 보였다. 추웠다. 점점 더 추워졌다. 그들의 시야가 미치는 곳은 전부 불에 탄 흔적뿐이었다. 암흑 너머로 눈에 띄지 않고 움직이는 침침한 해의 자취.”

2023년에 세상을 떠난 현대 미국 문학의 거장 코맥 맥카시의 소설 ‘더 로드’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 작품은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을 수상하며 맥카시를 ‘서부의 셰익스피어’라는 영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한 대표작이다. 소설 속 세상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발생한 대규모 재난 이후 모든 것이 불타고 황폐해졌다. 자연은 죽었고 생명체 대부분이 사라진 가운데, 대기는 잿빛 공기로 덮여 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희망조차 불투명한 상태에서 막연히 남쪽을 향해 걷는다. 살아남은 사람들, 죽은 자들, 그리고 곧 죽음을 맞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만난다. 때로는 도움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외면하기도 하고 때로는 도망을 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두 사람은 ‘선’(goodness)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작가는 아이의 쉬운 표현을 빌려 도덕적 가치의 중심을 ‘착한’(good)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고, 그 반대되는 것을 ‘나쁜’(bad)이라고 명명한다.

모든 것이 불타버린 세상에서는 법과 질서, 도덕성도 함께 불타버렸다. 그것은 ‘먹을 것이 없는 세상’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늘 먹을 것이 문제’인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점차 인간다움을 잊기 시작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오래된 변명 하나로 타인의 고통이나 희생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만의 부귀영화를 좇는 현시대 우리의 일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세상에서 ‘선’을 지키려는 ‘착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적은 인간성(humanity)을 잃어버린 ‘나쁜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러한 세상에서 인간성을 지키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와 강인함이 필요하다. 소설 속 아버지에게는 아들에 대한 사랑이 그 힘의 원천이다. 그리고 늘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아이의 시선 속에서 아버지는 ‘선’과 ‘희망’을 유산으로 남기고자 최선을 다한다.

건강이 극도로 악화한 아버지는 자신들은 “불(fire)을 운반하는 사람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 채 어린 아들을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난다. 세상의 잔혹함 속에 아들만을 혼자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함께 죽음을 택하려고도 생각했지만, 최후의 순간 아버지는 희망을 믿기로 한 것이다. “선(goodness)이 내 아이를 발견할 것이야”라고. 악이 아이를 발견한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뻔한 일이다. 결국, 인간의 미래와 희망은 ‘선’에 달려있음을 시사한다. 그의 희망은 현실이 되어, 살아남은 선한 가족이 그 아이를 발견하고 그들은 다시 가슴 속 불을 품은 채 길을 떠난다. “아저씨도 불을 운반하나요? 그럼. 불을 운반하지.”

소설 속 ‘불’은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다. 우선, 불은 인간만이 사용할 수 있는 도구라는 점에서 ‘인간’ 그 자체를 상징한다. 또한,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신으로부터 훔쳐 인간에게 주었기에, 불은 신성한 힘과 위험한 힘을 동시에 갖고 있다. 불은 어둠을 밝히고 차가움을 따뜻하게 덥히는 이로운 것이지만, 동시에 소설 속에서처럼 세상을 모두 태워버릴 수 있는 파괴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불을 사용하는 유일한 존재다. 그러기에 따뜻함과 지혜를 지닌 동시에 무서운 파괴력을 함께 행사할 수 있는 존재다. 불로써 세상을 빛내고 덥힐 것인가, ‘싹 다’ 태워버릴 것인가.

작가는 모든 희망이 다 사라지고 ‘신마저 살 수 없는’ 회색빛 세상에서 다시 희망이 싹을 틔울 미래를 암시한다. 아버지로부터 선을 배운 아이, 그리고 아이와 동행하는 위험과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또 다른 착한 가족을 통해서다. 이처럼, 힘든 세상 속에서도 우리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에게는 ‘인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희망은 ‘선’과 ‘도덕성’, 그리고 ‘정의’인 것이다. 그러니, 데이비드 소로가 ‘시민의 불복종’에서 주장했듯, 정치와 경제 그 모든 것에 앞서서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길러야 할 것”이다.

지난해, 예고 없이 들이닥친 여러 비극 속에서 우리는 울었고 괴로워했고 분노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일어나 길을 떠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불을 운반하는 존재다. ‘공감력’과 ‘도덕성’과 ‘정의’라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인한 힘으로 무장한 채 다시 걸어가야 한다. 세상을 따뜻하게 밝히는 가슴 속 불을 품은 채 2025년의 길을 걸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