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저에게 ‘시사’는 당신이란 사건이기에 ‘난장’으로 편지를 띄웁니다. ‘하늘이’ 살해 교사의 우울증 병력이 알려지고 기가 죽은 당신이 안타까웠어요. 사람들이 범죄자로 보는 것 같다고 당신은 외출조차 두려워했지요.

교사인 또 다른 당신은 ‘하늘이 법’을 걱정하면서 혹시나 자신에게도 폭력성이 숨겨져 있는지 불안해했죠. 당신 잘못이 아니랍니다. 우울증은 그런 종류의 폭력과 인과관계가 없어요. 당뇨가 있다고 살해의 원인이 당뇨는 아니잖아요. 우울증은 차라리 자신을 해할지언정 무기력해서 남을 해칠만큼의 에너지도 없고 폭력적이지 않아요. 살해 여교사처럼 컴퓨터를 부수고 동료 교사의 팔을 꺾는 행동은 일어날 수 없어요.

정신과 의사로 살면서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있어요. 우울증은 왜 여리고 착한 사람들에게 깃들까? 남을 속이고 해코지하는 사람들은 진료실에 오지 않아요. 선한 사람이 우울을 얻고 마음고생을 하는 아이러니, 혼자 애들 다 키우고 겨우 마음의 문을 연 상대가 돈을 노린 사기꾼이고 지적 장애가 있는 모녀를 성적으로 괴롭히는 삼촌이라는 세계는 뭔가요. 남에게 피해를 줄까 거절 못하는 당신이 계속 이용당하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에서 작은 목소리는 우련하게 울려 퍼질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상대에 대한 판단을, 특히 정신질환을 향한 혐오를 멈추기 바랍니다.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수용하고 그 이상의 해석은 덧붙이지 않는 태도, 판단 중지는 무관심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는 고유한 타인을 존중하는 것이겠지요. 상대에 뭔가를 해주고 싶은데 아무것도 못해서 무력감을 느낀다면, 그럴 때는 바라만 보아도 충분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저 바라보는 것뿐일지라도 이 순간 당신 존재의 증인이 된다는 의미니까요. 제가 진료실에서 마음으로 건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행복해지는 걸 제가 똑똑히 지켜볼게요.”

낮에 당신이 물었지요. “불행해요. 나도 남들처럼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까요?” 매일 행복하다면 그건 술에 취한 상태거나 광기겠지요. 행복은 ‘행복감’에 있는 게 아니라 현재의 지분을 늘리는 데 있다고 믿어요. 행복감에 초점을 맞추면 불행을 더 자주 느끼게 되는 역설, ‘감’이란 원래 변덕스러운 날씨 같아서 기복이 심하니까요. 행복은, 과거의 기습으로부터 현재의 울타리를 쌓는 일이겠지요. 미래의 무게에 현재가 짓눌리지 않게 걱정이란 가방을 들어주는 일, 날씨가 궂어도 햇빛을 믿고 현재의 정원을 가꾸는 것, 현재의 정원에 나만의 팻말을 다는 일이겠지요.

오랫동안 불행의 원인을 추적하던 당신은 “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묻고 또 물었죠. 나쁜 일의 원인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어요. 사고를 당하거나 중병에 걸리는 데는 원인이 있겠지요. 하지만 동시에 원인이 없기도 합니다. 회복할지 어떨지는 노력에 달렸을 수도 운에 달렸을 수도 있겠죠. 적당히 원인을 찾되 어쩔 수 없는 건 정말로 어쩔 수 없다고 여길 필요도 있어요. 불행에 원인이 있든 우연 혹은 숙명이든, 자신이 좀 더 납득하기 쉬운 쪽, 살아가기 편한 쪽을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우울이 고개 떨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자주 자책하던 당신의 말을 기억합니다. “그때 왜 그랬을까” 사람들은 인생의 고비나 갈림길에 섰을 때를 잘 기억하기에 마치 갈림길에서의 선택 하나에 운명이 정해지는 것처럼 생각하죠. 하지만 인생이란 의외로 하루하루의 작은 선택, 어느 쪽을 선택하든 별반 차이가 없는 선택의 축적에 따라 방향성이 정해지는 게 아닐까요? 뼈아픈 후회에서 당신이 좀 더 편해지길 바랍니다.

진료실 불 끄기 전에 늘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 있어요. 눈물 묻은 티슈가 담긴 작은 쓰레기통을 비우며 경건해져요. 수북이 쌓인 당신들의 눈물은, 슬픔의 증거일까 사랑의 증거일까 문득 궁금합니다. 왠지 윤동주를 이해할 것도 같았어요.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차마 밤하늘을 떠나지 못하고 별 하나하나 호명하며 느꼈을 시인의 슬픔, 이제는 당신의 슬픔을 헤아립니다. 기다림이 사람을 얼마나 외롭게 하는지, 상대가 사라질까 늘 불안한지, 사람이 구원일 때 얼마나 아팠을지.

불안이 자유의 현기증일 수 있듯 우울은 어쩌면 슬픔의 무늬를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일지 몰라요. 시인 허수경은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노래했죠. 저는 아직까지 슬픔만 한 야생적인 사랑을 본 적이 없답니다. 각자 슬픔의 우물에서는 자신의 슬픔 밖에는 안 보이겠지만 우물 깊은 곳, 지층 아래로 내려가면 지하 물줄기로 다 연결됩니다. 근원적인 슬픔의 수맥에서는 당신과 제가 서로 다른 둘이 아니겠지요.

권명환 해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