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얼마전 대선 출정식을 방불케 했다는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도입을 제안했다. 국회의원이 마음에 안 들면 국민이 의원직을 박탈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이전에도 몇몇 정치인이 의원소환제 필요성을 언급하긴 했지만 반향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이 대표가 굳이 이 화두를 다시 꺼낸 건 눈엣가시 같은 국민의힘 견제용일지 몰라도 국민 여론 역시 뒷받침된다는 계산이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헌법으로 4년 임기가 보장된 국회의원의 중도 소환은 일반법이 아닌 개헌 사안이라는 의견이 다수라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이 대표나 친명계가 금기시하는 개헌 논의의 한 갈래를 이 대표가 제기한 셈이 됐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심판 결론이 임박하면서 개헌론이 고개를 든다. 이른바 ‘87체제 한계론’이다. 정치권에선 국민의힘이 가장 적극적이고, 민주당에서도 비명계를 중심으로 개헌론이 쏟아진다. 조기 대선에 대비해 몸 풀기에 나선 잠룡들과 정치 원로들마저 진영을 불문하고 “이번이야말로 개헌 적기”라며 입을 모은다. 대통령 4년 중임제 도입부터 이 참에 의원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로 바꾸자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권력구조 개편과 함께 지방분권을 못 박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국회의원 숫자를 줄이자는 말은 거의 없다. 논의 선상에 오르기만 하면 국민이 제일 반길텐데도 그렇다.
현재 개헌론이 윤석열 대통령의 난데없는 비상계엄 선포와 탄핵 정국에서 불 붙은 만큼 ‘대통령 힘 빼기’에 열중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긴 하다. 1987년 개헌으로 장기집권 독재자 출현은 막았지만, 여전히 대통령 권한이 막강해 지금 같은 비극을 불렀다는 문제의식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선출된 대통령 8명 중 벌써 3명이나 국회에서 탄핵됐다는 건 역설적으로 제왕적 대통령 못지 않게 의회의 반작용도 강력하다는 반증이라 볼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25건이나 법률 거부권을 행사한 배경엔 민주당의 입법 권력이 자리한다. 계엄과 탄핵은 대통령과 의회의 강 대 강 충돌인 것이다. 대안으로 주목받는 4년 중임제 하에서 독선·아집의 대통령과 사법리스크에 쫓기는 대표를 둔 다수당이 안 나온다는 보장이 있나. 심지어 그런 결점을 함께 갖춘 정부 여당도 탄생할 수 있다.
탄핵 사태 직전까지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명 ‘명태균 게이트’ 본질은 누가 뭐래도 대통령 부부의 공천 개입 의혹이다. 그러나 무려 5번이나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이 6선 고지에 오르려고 어떤 일을 벌였는가는 그에 못지 않은 흥미 요소다. 최고 권력자를 움직이기 위해 정치 브로커를 동원하고 자신이 받은 세비 절반을 그에게 갖다 바쳤다. 어떤 약점이 잡혔는지 10살이나 아래인 브로커로부터 “왜 잡소리 하냐”는 모욕을 듣고도 꼼짝 못한다.
우리 국회의원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사건이 어디 이뿐인가. 22대 국회 최고령인 5선 의원은 증인이 대통령의 부부생활까지 언급하는 판을 국회에 깔아줬다. 전당대회를 앞두고 돈봉투를 살포해 전현직 의원들이 무더기 기소된 정당에서는 정당법 위반 범죄에 공소시효 특례를 적용하고 소급까지 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시도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모습을 대한민국 국회보다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최근 논의되는 여러 권력구조 개편안 중 여론조사상으로 가장 인기 없는 제도가 의원내각제다. 공천권을 쥔 보스에게 잘 보이려고 온갖 아첨을 떨고, 적이라고 판단되면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저질 막말을 내뱉고, 국민을 대리하라고 선택받은 자들이 자신들의 범죄를 덮기 위해 방탄법을 만드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이들이 지금의 윤석열, 지금의 이재명을 만들었고 앞으로도 만들어낼 게 뻔하다. 면책 불체포 등 이미 200가지도 넘는 특혜를 누리는 국회의원에게 한 줌의 힘도 더 실어줘서는 안된다는 국민 의지가 내각제 거부감으로 표현된 것이다.
1948년 제헌국회가 의원 200명으로 출발하면서 헌법엔 ‘200명 이상’이라 규정한 이유는 통일에 대비한 포석이었다. 통일은 낌새조차 없는데 어느 새 야금야금 100석이나 불어났다.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바로 이듬해, 날치기로 의석수를 23석이나 늘려 299석으로 만든 게 우리 국회의 민낯이다.
사람을 바꾸는 걸로 안되니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시스템을 아무리 고쳐도 운용할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게 그동안의 경험칙이다. 사람을 못 바꾸면 줄이기라도 해야 한다. 저출생으로 인구가 감소하니 300명이라는 숫자를 고집할 필요는 더 없어졌다. ‘의원 축소’를 뺀 개헌론의 진정성을 국민은 믿지 않는데 정치권만 모르는 듯하다. 사실은 모르는 척 하는 것일 게다.
강필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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