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잊히고 묻힌 이를 이야기 속으로 초대한다. 초대해서는 그이의 사연에 빛을 비춰준다. 그리하여 어둠 속에 곪아 있던 그이의 상처를 대면하게 만든다. 스웨덴 한림원이 꼽은 한강의 소설 ‘회복하는 인간’은 ‘당신’으로 지칭되는 정 작가의 이야기다. 서른을 넘긴 정 작가는 일주일 전 언니의 장례를 치르다 발목을 삐었다. 삔 발목에 뜸을 뜨다 입은 화상을 방치해서 조직을 도려내야 할지도 모를 상태가 되었다. 발목의 상처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소설은 자매의 이야기다. 정 작가와 죽은 그녀의 언니에 관한 이야기. 둘은 지난 몇 년간 왕래조차 없었는데, 이유는 10년도 더 지난 비밀 때문이었다. 정 작가의 언니는 결혼 전 산부인과에 가서 소파수술(자궁내막을 긁어내 조직을 채취하는 시술)을 받았다. 정 작가를 보호자로 데려갔던 이유는 누구에게도 그 비밀을 발설하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 그녀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을 만큼 정 작가가 온 힘을 다해 언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언니는 그날 이후 정 작가를 외면했다.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고 눈조차 제대로 맞추려 하지 않았다. 언니가 불치병으로 죽고 나서야 파탄 났던 그 시간이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지, 정 작가는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 없게 된다.

나에게도 온 힘을 다해 사랑했던 친구가 있었다. 오래 전 일인데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보경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전학을 왔다. 같은 5학년인데 왠지 모르게 성숙해서 두세 살 많은 언니 같았다. 눈이 사시여서 남자애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그 애와 내가 짝이 된 건 나눗셈 때문이었다. 어느 날 담임선생이 나를 부르더니 보경에게 나눗셈을 가르쳐 주라고 했다.

나는 쉬는 시간마다 교과서를 펼쳐놓고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기본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길래 방과 후에 남아 공부를 더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보경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안 된다고 했다. 사정이 생겨 고모네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고모가 엄해서 바로 하교해야만 한다고.

보경은 나와 같은 아파트 단지 1층에 살았다. 하교 후 보경은 그 넓은 집을 청소하고 빨래를 한 뒤 저녁을 준비했다. 보경의 당부대로 초인종 대신 부엌 창문을 두드리면, 고모가 없는 날은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보경은 현관문을 열며 누구보다 환하게 웃어줬다. 그 환대가 정말 좋았다. 틈만 나면 찾아가 그 집 부엌 창문을 두드렸다. 걸레질하는 그 애를 따라다니며 수다를 떨었다. 늘 술에 취해 호통을 치는 할아버지에 대한 불만부터 엄마가 정성껏 말린 육포를 혼자 다 먹어 버린 증조할머니 이야기까지. 청소가 빨리 끝나면 수학을 가르쳐주고 숙제를 도와주었다.

학년이 올라가고 반이 바뀌어도 나는 보경을 찾아갔다. 늦는다던 보경의 고모부가 일찍 퇴근하는 바람에 쫓겨나듯 그 집을 나온 뒤로는 전처럼 자주 만나지 못했다. 부엌 창문을 두드려도 보경이 답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무엇 때문에 보경의 고모부가 화가 난 건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조심해야 한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보경이 학교를 며칠 결석한 날은 참지 못하고 열리지 않는 부엌 창문을 여러 번 더 두드리고 말았다. 창문은 평소와 달리 벌컥 열렸다. 낯선 중년 부인이 얼굴을 내밀며 누구냐고 물었다.
보경이 고모신가요?
나도 물었다.
누가 누구 고모야? 보경이가 그래? 식모 주제에 별꼴을 다 보겠네.

그날 이후 보경은 나와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고 눈도 제대로 맞추려 하지 않았다. 그 중년 부인이 보경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나눗셈을 잘하게 된 보경에게 뭘 더 가르쳐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중년 부인의 말대로라면 나보다 한 살 더 많았던 보경은 몇 달 뒤 인사도 없이 그 중년 부부를 따라 이사를 가버렸다.

“그때 당신은 그녀를 이해한다고 느꼈다. 여러 겹 얇고 흰 커튼 속의 형상을 짐작하듯 어렴풋하게.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여자애가 아니었다. 다만 가장 안전한 곳, 거북과 달팽이들의 고요한 껍데기 집, 사과 속의 깊고 단단한 씨방 같은 장소를 원하는 것뿐이었다.(한강 ‘회복하는 인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