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유달리 봄이 오는 것을 기다리게 된다. 늦은 밤 조용한 유엔공원과 대연수목전시원을 걷는 길에 만개한 매화가 가로등 조명을 받으며 우아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어수선한 시류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모습으로 자리한 매화의 위용에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한참을 마주한다.

간만에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책을 다시 손에 들었다. 짧은 그의 문장 속 단어, 그 단어가 가슴에서 다시금 일렁거린다. 섬세하고도 명징한 그의 글은 몇 번을 읽어도 참 좋다. 쥐스킨트는 세계적으로 성공한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문학상 수상과 인터뷰를 거절했으며, 사진 찍히는 일, 혹은 그 자신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절연을 선언하며 은둔생활을 지속하기로 유명한 작가다. 우리에게는 ‘향수’를 비롯해 ‘좀머씨 이야기’ ‘콘트라베이스’ ‘깊이에의 강요’ 등으로 사랑받는 작가다. 그의 단단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글 속에서 만나는 쥐스킨트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이런저런 생각을 더듬던 중 그의 책 ‘깊이에의 강요’ 중에서 첫 문장이 들어왔다. “소묘를 뛰어나게 잘 그리는 슈투트가르트 출신의 젊은 여인이 초대 전시회에서 어느 평론가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그는 악의적 의도는 없었고, 그녀를 북돋아 줄 생각이었다. ‘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첫 문장에서 만나는 이야기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다. 먼저 젊은 여인은 굳이 여인이 아니라 신진작가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지만 중요한 것은 젊다 혹 신인이라는 것이며, 재능을 갖췄다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칭찬을 통해 예술에 더욱 매진하라는 취지의 이야기에서 ‘깊이’라는 한 단어에 재능있는 젊은 여인은 결국 자살하게 된다. 미래가 밝은 젊은 여인을 자살에 이르게 한 그 ‘깊이’라는 단어가 무엇이기에 칭찬과 격려를 위한 말이 그녀에게는 깊이의 부족에 사로잡혀 스스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인가? 어쩌면 단순할 수도 있는 깊이라는 단어. 무엇이 스스로를 더욱 큰 미궁으로 빠져들게 했을까?

이는 전문가라는 견장을 단 평론가의 말이기 때문이다. 평론가는 젊은 여인의 예술세계를 더욱 매진하길 격려하는 차원에서 뱉은 말이었으나, 그 말이 일반 사람들 속으로 파고 들면서 ‘그녀에게는 깊이가 없어요. 사실이에요 나쁘지는 않은데, 애석하게 깊이가 없어요’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원래의 의미는 사라지고 예술의 본질에서 젊은 여인은 깊이가 없다는 이야기로 전이 되어버렸다.

책의 끝 무렵에 앞에서 말한 평론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사람이 상황을 이겨 낼 힘을 기르지 못한 것을 다 같이 지켜보아야 하다니, 이것은 남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다시 한번 충격적인 사건이다. ···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작금의 우리사회에서도 상대적 우위를 점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전문적 식견이라며 말과 글에서 너무도 책임없이 무차별적으로 뱉어내는 모습을 많이 만나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각자는 존재만으로도 빛나야 하는 사람들이다. 유한한 시간 속에서 각자는 주어진 숙명과도 같은 일을 수행하며 착실하게 생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누가 이들에게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필자는 ‘깊이가 부족하다’를 ‘기본에 충실하라’는 말로 풀어보았다. 기본에 충실하면 기초가 튼튼해 다음을 쌓을 수 있게 된다. 이 쌓는 시간의 과정에 충실함이 더해져 기본에서 깊이로 진행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이 다르므로 타인의 삶에 쉽게 참견하면 안 된다. 그렇다고 관심마저 끊으라는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더욱 세심하게 우리 사회를 챙겨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조력자가 되었으면 하는 희망이다. 보다 순화되고 정제된 말의 사용으로 주변을 조금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자신의 자리에서 스스로 빛나는 매화의 아름다움처럼 고요한 아침이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