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趙之瑞等頭, 徇示八道後, 置之溝壑·조지서등두, 순시팔도후, 치지구학
전교하기를 “ … … 조지서(趙之瑞) 등의 머리를 팔도에 조리돌린 후 도랑에 버려두고 만일 알던 수령이 혹시라도 거두어 장사 지내는 자가 있어, 일이 발각되면 크게 죄를 줄 것이니, 이것을 효유하라.”
傳曰; “ … … 趙之瑞等頭, 徇示八道後, 置之溝壑. 若素識守令, 惑有收葬事覺, 當大科罪, 其論之.”(전왈; “ … … 조지서등두, 순시팔도후, 치지구학. 약소식수령, 혹유수장사각, 당대과죄, 기론지.”)
위 문장은 조선왕조실록 중 ‘연산군일기’ 53권, 연산 10년(1504) 윤4월 28일에 나오는 기사 중 일부이다. 스승인 조지서를 참형한 후 팔도에 조리돌린 다음 도랑에 버리도록 한 내용이다. 끔찍한 내용이다. 그러면 조지서가 누구이며 어떤 죄를 지었는지 간단히 살펴보자.
조지서(趙之瑞·1454~1504)는 경남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에서 출생했다. 1474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1474년 문과중시에 1등으로 급제했다. 홍문관 교리·응교를 거쳐 세자(뒷날 연산군)의 스승이 됐다. 조지서가 공부를 싫어하는 세자를 엄하게 꾸짖으며 억지로 공부하도록 했다. 이에 세자는 조지서에게 원한을 품었다.
1495년 연산군이 즉위하자 조지서는 자청하여 외직인 창원부사로 나갔다가 곧 사직하고, 고향에 은거했다. 연산군은 1504년 갑자사화를 일으키고는 조지서를 연루해 참형에 처하였다.
엊그제 필자와 한문 공부를 하는 분들과 하동 옥종 대곡리 삼장골 조지서의 묘를 답사했다. 도로에는 0.8㎞ 표지판이 있으나 정작 마을에서 묘로 가는 표지가 없어 헷갈렸다. 처음 가는 사람은 찾을 수가 없다. 필자는 가본 적이 있지만 길이 익숙하지 않아 쉽지 않았다. 마을 길에서 겨우 경운기가 다닐 비포장길을 200m 이상 걸어 다시 대숲을 50m가량 더 지나야 한다.
조지서의 묘 100m 전쯤에 그의 후처인 영일 정씨의 묘가 있다. 조지서가 참형된 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중종이 1508년 영일 정씨의 의열(義烈)을 기려 정려(旌閭)를 내렸다. 정씨는 남편의 참형 뒤 숨어 지내며 3년 상을 마치고, 조상 제사를 빠짐없이 받들었다. ‘중종실록’ 9권, 중종 4년(1509) 10월 25일 기사에 그런 내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