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토끼봉 중턱부터 쌓인 눈은 무릎까지 차올라 걷기조차 힘들지만 설경이 빚어내는 아름다움과 장엄함은 등산객들을 매료시킨다.

겨울 지리산에 눈이 없다? 그랬다. 섬진강을 따라 화개장터를 지났을 때도 지리산 능선에 눈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광양 백운산에는 잔설이 선명했다.

쌍계사 앞을 지나 신흥삼거리에서 목통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지난 여름 수해로 끊긴 도로에 대한 복구와 확장공사로 길이 어지러웠다. 이곳에도 눈이 내린 흔적은 없었다.

산행 초입까지 안내를 맡아준 하동 차문화회 강기주씨의 설명. “화개는 지리산이 북서풍을 막아주기 때문에 겨울에도 따뜻하다. 눈이 잘 내리지도 않지만 또 내리더라도 쌓이지 않고 곧바로 녹는다”. 그럴까. 칠불사를 코 앞에 둔 범왕교에서 지리산을 올려다 보았다. 겨울 지리산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메말랐다.

그러나 토끼봉 중턱에 올라서자 상황은 돌변했다. 겨울 지리산은 역시 겨울 지리산이었다. 무릎까지 눈이 쌓였다. 한국전쟁 직후 많은 빨치산들이 최후를 마감한 빗점골에서 잔설을 휘감아 불어오는 바람은 거셌다. 뱀사골로 넘어서자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지리산 설경은 절정에 달했다.

산행코스는 범왕교~우물~참샘~1,293m봉~전망대~토끼봉(1,533m)~화개재~뱀사골대피소~간장소~병풍소~오룡대~반선정류장. 6시간30분 이상 걸린다.

범왕교에서 물탱크와 묘지 사이로 산길이 시작된다. 서너평이 될까말까한 계단식 논이 촘촘하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논바닥은 안보이고 논두렁만 보인다. 손바닥만한 논도 이 깊은 골짜기에서 고달픈 삶을 살다간 민초들에겐 재산목록 1호였을 것이다.

10분 뒤 얼어붙은 계곡을 건넌다. 무덤 갈림길에서 왼쪽. 산짐승의 침범을 막기위해 쳐놓은 그물망을 따라 간다. 소나무 숲을 지나면 다시 계곡이다. 눈밭이 나온다. 발목까지 덮인다.

지리산 긴급구조 ‘16-03’지점을 지나면 오르막. 눈길이 제법 미끄럽다. 여러사람이 지나갔지만 발자국은 하나. 한 사람 지나간 흔적만 남았다. 너덜이 기다린다. 길이 눈에 덮였다. 엉뚱한 길로 들어서기 십상이다. 30분 정도 오르면 능선에 닿는다. 여기서 토끼봉까지 3.5㎞.

가드레일을 따라 평지가 잠시 이어진다. 누군가 나무에다 ‘우물’이라고 적어 놓았다. 5m 앞에 작은 샘이 있다. 다시 오른쪽으로 15분 정도 오르막. 억새가 있는 평평한 지점에 닿으면 오른쪽으로 튼다. 산죽 군락이 기다린다. 곧 참샘이다. 토끼봉 2.3㎞. ‘희망의 샘’이란 팻말이 있다. 물은 땅속에서 솟아서인지 미지근하다.

참호처럼 움푹 팬 길. 꺼진 공간을 눈이 채우고 있다. 눈이 허리춤까지 차 올랐다. 길 옆으로 돌아보지만 사정은 비슷하다. 무릎을 높이 들어야 한다. 힘이 배로 든다.

파랗게 맑던 하늘에 옅은 구름이 밀려온다. 사방이 컴컴해진다. 힘차게 따라오던 그림자는 희미해진다. 하늘에서 찬공기가 밀려내려오는 바람이 매서워진다. 산죽 댓잎이 부대끼면서 슥슥 찬 소리를 낸다.

토끼봉 정상이 보이기 시작하자 오른쪽으로 천왕봉이 열린다. 형제봉 칠선봉 촛대봉 천왕봉 중봉…. 장엄함이여. 삼신봉까지 뻗어내린 지리산 남부능선이 세상을 온전히 압도한다.

능선에 닿아 10분 정도 치고나가면 토끼봉 1㎞를 가리키는 이정표를 만난다. 수북이 쌓인 눈이 산죽을 깔아뭉갰다. 폭설에 파묻힌 산죽은 길을 없앴다. 걷는게 아니라 눈을 ‘밀고 나간다’.

1㎞라는 이정표를 보고 40분을 걸었다. 오른쪽에 사각형의 잘생긴 바위전망대가 있다. 시커멓게 솟은 천왕봉, 그 뒤로 천왕봉을 떠받치는 중봉, 앞에는 세석평전과 촛대봉이 우뚝 섰다.

앞 사람들이 지나간 발자국을 따라가다보니 발걸음 템포 맞추기가 쉽지 않다. 토끼봉을 앞두고 잠시 오르막. 전망대에서 토끼봉 정상까지는 10분이면 된다.

하산길은 뱀사골로 잡았다. 화개재까지는 완만한 내리막이다. 20분. 길은 완벽하다. 화개재에서 직진하면 노고단이다. 오른쪽으로 내려선다. 뱀사골대피소까지는 계단. 미끄럽다.

뱀사골대피소에서 반선까지는 9㎞. 겨울에는 일찍 어두워지기 때문에 하산길은 최대한 서둘러야 한다. 600m 내려가면 철교를 하나 건넌다. 화개교. 여기서 간장소까지는 45분 정도 걸린다. 얼음과 눈이 함께 있는 곳은 특히 미끄러우므로 조심해야 한다. 간장소 깊은 물은 푸르다 못해 검은색을 띤다.

뱀사골은 소(沼)와 긴 계곡으로 유명하다. 최근에는 곳곳에 다리가 놓여지고 통나무 보행로가 만들어졌다. 자연보호와 산행의 편리함, 안전함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징검다리를 뛰어 건너는 재미나 칼날같은 바위를 붙잡고 간신히 절벽을 오르는 짜릿함이 없어졌다.

간장소에서 병풍소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30분 정도 걸린다. 병풍소는 뱀사골 계곡 가운데서도 단연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산기슭에서 흘러내린 물이 어른 팔뚝만한 고드름으로 변했다. 장관이다. 바위를 뒤덮은 얼음은 수만년 세월의 더께를 뒤집어쓴 석회암동굴 종유석 같다.

병풍소에서 탁용소를 지나 와운교까지는 40분 이상 거리다. 와운교에서는 임도를 따라 걷는다. 달궁계곡으로 오르는 삼거리까지는 30분 정도 걸리고 상가를 따라 내려가면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당부하건대 뱀사골로 내려오려면 서둘러야 한다. 기막힌 경관을 밝을 때 감상해야 한다. 어두워지면 감동은 반감된다. / 글·사진=김용호기자

/ 산행문의 = 다시찾는 근교산 취재팀

(051)500-5150, 245-7005



[떠나기 전에]
토끼봉은 반야봉을 기점으로 24방위의 묘방(卯方)에 솟아있다 해서 토끼봉(卯峯)으로 불린다.

들머리의 칠불사는 가야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왕후와 그의 오빠 장유화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성불하여 칠불암이라 부른다. 세계건축사전에도 등재된 아자방(亞字房)은 한번 불을 지피면 온기가 석달열흘 간다는 독특한 구조로 유명하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화개재는 멀리 화개가 보인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재를 넘어 다닌 옛사람들의 애환이 많이 서린 곳이다. 뱀사골은 수량이 풍부한 계곡으로 오룡대에서 막차까지 계곡 휴식년제를 시행하고 있다.

토끼봉에서 뱀사골을 거쳐 내려오는 길은 6시간 30분 이상이 걸리는 힘든 산행이지만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을 비롯한 남부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환상적인 코스다.

계곡으로 들어서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

뱀사골에는 소금장수가 소금가마니를 빠뜨렸다는 간장소, 산신제를 올렸다는 제승대, 병 모양의 병소, 이무기가 살던 용소, 용이 머리를 흔들며 승천한 오룡대 등 수많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범왕골의 등산로는 한적하다. 한적한 골짜기는 반달 가슴곰의 서식지로 알려져 있다. 산을 찾는 산꾼들은 들짐승을 놀라게 하는 일이 없도록 협조를 부탁한다. 겨울장비를 반드시 챙기고 추위에 대비하자. / 이창우 산행대장 www.yahoe.co.kr

[교통편]
겨울에는 해가 일찍 지는데다 6시간30분 이상 걸리는 긴 산행시간이 부담스럽다. 따라서 교통편에 상당한 신경을 써야 한다.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하동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 7시10분, 8시30분, 9시10분에 출발한다. 2시간10분 정도 걸린다. 9천5백원. 하동에서 칠불사행 버스는 오전 10시55분에 있다. 그러나 이 버스로 진입해서는 시간 맞추기가 어렵다. 오전 9시40분에 의신행 버스가 있지만 신흥삼거리에서 내려 범왕마을까지 약 1시간 정도를 걸어야 한다.

따라서 권할만한 방법은 일행이 3~4명 정도 되면 화개에서 범왕마을까지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다. 요금은 1만2천원.

뱀사골에서는 오후 4시45분과 5시10분, 6시25분, 6시50분에 인월까지 나오는 전주 광주행 버스가 있다. 1천2백원, 20분 소요. 인월에서 오후 6시10분에 부산행 직행버스가 있다. 다소 불편하지만 함양 진주를 거쳐 부산으로 오는 방법도 있다. 진주에서는 밤 10시, 11시, 12시 세차례 심야버스가 출발한다. 8천5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