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천왕봉 정상석에는 유명한 글귀가 있다.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하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부정할 수도 없고, 부인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백두산에 올라 16개 봉우리에 둘러싸인 '하늘 연못'인 천지(天池)를 맞닥뜨리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 황홀한 장관이 펼쳐내는 장엄한 모습은 너무 신비롭고 웅장해서 차라리 슬프다. 동시에 통일이 된다면 지리산 천왕봉 정상석의 글귀는 바로 이곳 백두산 정상석으로 옮겨와 다시 새겨넣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부질없는 생각이 잠시 뇌리를 스쳐간다. 산을 다닌 이후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던 백두산 천지를 향한 그리움이 비로소 해소됐건만 신비경에 홀린듯한 형언하기 힘든 감흥의 한 자락에 까닭 모를 슬픔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예상치 못했던 경험이다. 우리 땅으로 달려왔으면 금방 왔을 이 길을 중국 선양을 거쳐 1박2일 동안의 강행군 끝에 도달했다는 회한, 그리고 백두산의 진정한 정상인 장군봉(2749m)을 비롯한 북녘땅의 봉우리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아직은 갈 수 없다는 진한 아쉬움 때문일 테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어 만세를 부를 수도 있고 큰 절을 올릴 수도 있다. 그리고 기자와 비슷하게 경건함과 진한 슬픔이 동시에 엄습하는 듯한 감정을 맛볼 수도 있겠다.

	백두산은 한국인이라면 남녀노소 구별 없이 누구나 꼭 한번은 가고 싶어하는 민족의 성산. 1년 중 며칠 되지 않는다는 청명한 가을 날씨 속에 부산은행 젊은 직원들로 구성된 '알파리더' 팀원들이 천지를 굽어보며 백두산 서파 능선길을 걷고 있다.

이번 주 '근교산&그 너머'는 한민족의 태(胎)자리, 배달 겨레의 성지 백두산(白頭山)이다. 백두산의 등산 코스는 크게 네 가지. 북파 서파 동파 남파가 그것이다. 하지만 동파와 남파의 들머리는 북한 영토 내에 있어 갈 수 없다. 현재까지 일반 등산객이 갈 수 있는 코스는 중국땅인 서파(西坡)와 북파(北坡) 코스. 이 중 제대로 된 산행을 할 수 있는 알짜배기 코스는 조중 국경 5호 경계비에서 시작해 청석봉(2662m)~백운봉(2691m·장백산)~녹명봉(2603m)~용문봉(2596m)으로 연결되는 서파 코스다. 철벽봉(2550m)과 천문봉(2670m) 정도만 개방돼 있는 북파 코스의 경우는 지프차를 타고 정상부의 기상대 앞 주차장까지 오른 후 천지를 보고 언덕을 내려가 달문에서 천지 물에 손을 담글 수 있어 의미가 크지만 산행이라고 보기에는 3% 모자란다. 가장 일찍 열린 코스지만 사실상 관광 코스로 봐야한다.

따라서 이번 백두산 산행은 지난 1990년 이후 개발돼 산꾼들이 주로 찾는 서파 코스 위주로 진행됐다. 특별히 부산은행의 20, 30대 젊은 직원들로 구성된 '알파(α)리더' 소속 30여 명이 동행했다.

주지하다시피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장백산(長白山)이라고 부른다. 정상부가 하얗게 보이는 기간이 길다고 해서 명명됐다. 하지만 우리 민족이 부르는 백두산은 흰 머리라는 뜻이다. 조선족 가이드 이강(40) 씨는 "머리는 우두머리, 최고라는 뜻이 있고 흰색은 백의민족의 의미도 있으니 백두산이 옳은 이름"이라고 분석했다. 맞는 말이다.

'장백산'이라는 글자가 뚜렷한 중국 쪽 매표소를 통과, 300m가량 되는 숲길을 통과한다. 나무 덱을 설치해 걷기에 좋은 길이다. 지난 16일의 산행이었지만 이미 주변은 단풍이 한창이다.

곧 넓은 주차장. 6인승 지프차를 타고 30여 분 비포장 도로를 달려야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어느새 중국 당국은 아스팔트 포장도로와 40인승 버스로 바꿔놓았다. 산행 기점인 1300계단 밑 주차장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누군가 한마디 한다. "4~5년 전까지는 백두산 탐방객의 90%가 한국인이었는데 지금은 90%가 중국인이라고 하네. 과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백두산 서파 코스 중 날카로운 기암이 즐비해 특히 아름다운 녹명봉 인근 암릉 구간.

버스 이동 초기 보이던 자작 편백 등은 해발 2000m를 넘으면서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도착한 주차장이 산행 기점이다. 4개조로 나뉜 부산은행 알파리더 팀이 출발 준비를 한다. 1년에 일주일 정도밖에 안 된다는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가을 날씨다. 모두들 천지를 원 없이 볼 수 있겠다는 기대에 차 있다. 산행을 마칠 때까지 이렇게 청명한 날씨는 계속됐다. 가이드 이 씨는 "하늘의 복을 받았다"며 축하했다.

1300여 개의 계단을 오르며 시작되는 산행. 오가는 탐방객 대부분이 중국인들이다. 15분 만에 도착한 5호경계비 앞. 마치 거짓말처럼 장엄한 천지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호위하듯 도열한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천지 중심선을 기준으로 오른쪽 2시 방향을 보면 그 많은 봉우리 중 가장 높은 봉우리가 우뚝 서 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이라는 듯 엄지손가락을 곧추세운 듯한 모습. 백두산 정상인 장군봉이다. 지척이지만 북한 양강도 구역에 있어 갈 수 없다.

높이 1m 남짓한 5호경계비는 자세히 보면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볼품이 없다. 경비병도 없다. 탐방객들은 국경의 이쪽과 저쪽을 아무 거리낌 없이 넘나든다.

알파리더 팀의 방성빈 단장은 "날씨가 좋아 안전 산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스럽다. 그리고 이렇게 푸르고 장엄한 천지를 보게 되니 전율이 느껴질 정도다"라며 주체할 수 없는 감동에 젖었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됐다. 왼쪽에 솟은 마천우는 암봉이어서 일단 왼쪽 내리막으로 우회한다. 이어지는 청석봉까지는 비교적 평탄한 길. 오른편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천지를 끼고 신나게 달린다.

	본격 산행을 하려면 주차장에서 1300계단을 올라야 한다.

화산암으로 이뤄진 짧은 너덜지대를 지나면 편평한 청석봉 정상. 전망이 아주 뛰어나다. 가파른 길을 내려서면 다시 널따란 평원길. 정면의 백운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왼쪽의 완만한 평원으로 일단 꺾어야 한다. 고산화원 지대다. 백두산 산행 중에는 화장실이 없다. 그러니 살짝 살짝 볼일을 봐야 한다. 누군가 그 모습을 보며 하는 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장실."

30분가량 내려섰다가 오른쪽 작은 개울을 지난다. 천지의 물이 바위 틈새로 빠져나와 내를 이루는 곳이다. 송강하라고 불린다. 주변에 야생화가 지천이다. 천지의 물이라고 생각하며 일행들이 너도 나도 벅찬 표정으로 목을 축인다. 다시 오르막. 백두산 서파 코스 중 가장 힘든 구간인 백운봉 오름길이 시작된다. 이곳에서 백운봉 정상 바로 아래까지 1시간30분 가량 줄곧 올라야 한다. 중간 능선에 오른 뒤 오른쪽 가풀막으로 꺾어 다시 너덜지대를 통과해야 한다. 만주벌판을 달려 온 세찬 칼바람에 몸이 휘청거릴 정도지만 청명한 날씨 덕분에 힘든 줄 모른다. 이윽고 정상 밑 8부 능선 갈림길. 왼쪽으로 에돌아 넓은 평원에 닿는다. 이곳에서 잠시 도시락으로 민생고를 해결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정 호반 야외 레스토랑이다.

	용문봉 아래 안부 갈림길에서 하산을 앞둔 부산은행 알파리더 팀원들이 천지를 배경으로 힘차게 뛰어오르고 있다.

녹명봉을 향하는 길은 걷기 좋은 능선길이다. 사슴이 많이 살았다는 녹명봉 정상부는 칼날 같은 바위들이 수십 개나 솟아 천지와 조화를 이룬다. 비경이다. 사슴의 녹용을 닮은 듯도 하다. 녹명봉에서 차일봉 가는 길은 일부 가파른 내리막을 제외하면 대부분 평원길의 연속. 관일봉을 왼편에 끼고 용문봉(차일봉) 방향으로 내려서면 편평한 안부 갈림길이다. 이곳에서 직진해 용문봉을 지나 달문을 거쳐 비룡폭포(중국식 이름은 장백폭포)로 하산하는 길과 곧바로 왼쪽 능선길을 따라 옥벽폭포 옆을 거쳐 소천지 방향으로 내려서는 길이 있다.

2명의 중국인 산악가이드는 달문과 장백폭포로 이어지는 코스는 현재 폐쇄된 상태라는 예상치 못한 말을 듣고 소천지 방향으로 하산길을 잡았다. 일부는 "언제 다시 천지를 볼 수 있을까 싶어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며 아쉬워 한다. 완만한 평원으로 이어지던 길이 갑자기 칼날 능선길로 변하는 듯한 순간 모두들 탄성을 내지른다. 오른쪽 절벽 아래에 장엄한 비룡폭포(장백폭포)의 자태가 드러난 것. 200m쯤 더 능선을 내려가면 왼쪽에는 조금 작은 규모의 옥벽폭포가 기다린다. 10분 후 갈림길에서는 오른쪽 가파른 내리막을 타야 한다. 45도 안팎의 가파른 길을 따라 20분 정도 내려서면 어느새 나무 덱으로 정비된 길에 닿는다. 하산이 마무리된 셈이다. 뜨거운 김이 피어 오르는 온천수가 곳곳에 즐비해 백두산이 화산임을 재차 일깨워 준다. 이곳에서 5분이면 계곡을 건너 온천단지 주차장에 닿는다. 대개 8~10시간 정도로 알려진 서파코스를 식사 시간을 포함해 8시간 만에 주파했으니 날씨 덕을 톡톡히 봤다.


◆떠나기 전에

- 부산은행 '알파리더' 팀 동료애 물씬… 조선족 가이드 "모두 떠나도 고향 지킬 것"

	서파 최고봉인 백운봉 정상 아래에서 다리 경련이 난 여직원을 부산은행 남자 직원들이 도와주고 있다.

백두산은 한반도의 척추인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정점이다. 대간은 백두산에서 남으로 맥을 뻗어 낭림산·금강산·설악산·오대산을 거친다. 태백산에 이른 대간은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소백산·월악산·속리산·덕유산을 거쳐 지리산에 이른다. 이같은 대간의 형상은 조선 후기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에 잘 나타나 있다. 또 통일신라의 선승인 도선국사 역시 "우리 땅의 산줄기는 백두산에서 시작해 지리산에서 끝맺는다"고 했다. 그만큼 한민족의 정신적 고향이자 태생지로서 조상 대대로 성지로 추앙받아 왔다. 그뿐일까.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살아가는 200만 조선족들은 백두산은 한반도뿐 아니라 드넓은 만주벌판의 어머니산으로 예우하고 있다. 고구려와 발해를 거치는 장구한 우리 역사에서 드넓은 만주벌판이 엄연히 우리 땅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번 취재에서 보조 가이드로 일한 이상길(29) 씨는 일행들로부터 '광야에서'라는 노래를 배우고 감격에 젖었다. 이 씨는 "유행가 외에는 아는 노래가 별로 없었는데 이 노래를 들으니 너무 감격적이다"며 "다음부터는 한국에서 온 탐방객들에게 이 노래를 불러 드릴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아울러 "고향 친구들 대부분이 돈을 벌겠다고 한국으로 가 버려 추석이 되도 썰렁하다. 초등학교 동창회를 오히려 서울에서 할 정도니 나는 가지 못한다. 하지만 모두가 떠나버리면 이 땅은 누가 지키겠는가. 나는 반드시 여기서 성공할 것"이라며 일행을 배웅했다.

	중국식 이름인 장백폭포로 알려진 비룡폭포는 4계절 마르지 않고 얼지 않는 아름답고 웅장한 폭포다.

한편 이번 취재에 동행한 부산은행 알파리더 제3기 팀원들의 협력과 희생정신도 빛났다. 20~30대 젊은이들이긴 하지만 산행 경험이 거의 없는 여직원들 일부는 다리에 쥐가 나는 바람에 쓰러졌다. 하지만 주위 남자 직원들이 경직된 다리를 풀어주고 배낭을 대신 메는 등 팀워크를 발휘했다. 특히 지친 여직원들이 무안해 할까봐 오히려 "시간 많다. 괜찮다. 힘내라"며 안심시키는 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

아울러 한국 이름으로는 비룡폭포, 중국에서는 장백폭포라 부르는 폭포는 백두산에서 가장 웅장하면서도 아름답다. 천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높이 68m 폭포를 이루는데 겨울에도 얼지 않고 있는 모습은 장관 그 자체다. 북파코스인 천문봉에서 달문으로 내려섰다가 장백폭포 오른쪽 계단으로 내려서는 길이 있는데 최근에는 무슨 이유에선지 일시 폐쇄됐다. 어쩔 수 없이 주차장에서 폭포 300m 아래까지 왕복하는 관광코스를 통해 폭포를 친견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