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7년 부산포에 첫 왜관…임진왜란 거쳐 초량왜관까지 역사의 질곡과 함께 했던 곳
- 허물어진 지 120년 넘도록 반일감정 민족 恨에 갇혀 복원 시도 번번히 무산
- 쓰리고 아픈 역사지만 미래의 새장 열어야

21일 부산 중구 광복동 용두산공원. 일본인 관광객들이 '초량왜관' 비석 앞에서 발을 떼지 못한다. "부산의 근대사는 일본과 떼려야 뗄 수가 없어요. 조선 초기 부산포 개항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교류와 침략의 이중적 공간이니까요. 그 중심에 왜관이 있습니다." 향토사료연구가 김한근(52) 씨의 설명이다.

50여 m 떨어진 곳에 '부촌(富村)'이란 음식점 간판이 보인다. 대마도에서 파견한 왜관의 우두머리가 집무하던 관수가(館守家) 자리다. 찬바람만 나부낄 뿐 어떤 흔적도 없다. "이게 현실이에요. 초량왜관은 동아시아 최대 무역기지였지만, 한국전쟁과 근대화 시기를 거치면서 역사에 묻혀버린 겁니다."

오늘날 광복·남포·동광동의 도로나 건물 배치는 120년 전의 초량왜관 전경과 거의 일치한다. 해방기 귀환 동포와 한국전쟁 피란민을 수용하느라 새로운 도시계획을 할 수 없었던 탓이다. 부산대 김동철(사학과) 교수는 "구체적인 흔적(건물)은 지워졌지만 외형은 살아 있는 셈"이라면서 "상징성을 띤 관수가나 사신을 맞았던 객사부터 복원하자고 학계에서 수차례 제안했지만 진척이 없다"고 아쉬워했다.

■초량왜관 복원 실패의 역사

부산 중구청이 2007년 '초량왜관 전시관'으로 활용하기 위해 매입을 시도했던 중구 동광동 부산유치원 옛터. 민간 소유주가 건물을 철거하는 바람에 지금은 폐허로 방치돼 있다. 이노성 기자

초량왜관 복원 움직임이 등장한 것은 1990년대 후반. 명분은 '일본 관광객 유치'와 '원도심 재생'이었지만 매번 "조선침략의 기지를 활용해 돈을 벌려 한다"는 여론의 뭇매를 맞고 좌초됐다. 근대사를 바라보는 엇갈린 시선이 초량왜관 복원 실패사에 고스란히 묻어난 것이다.

2004년 부산 중구청은 초량왜관이 있었던 부산근대역사관~용두산 공원~광복로 1.8㎞ 구간을 '일본인 거리'로 개발한다고 발표했다. 초량왜관 복원과 ▷일본식 정원과 음식타운 조성 ▷특수조명을 설치한 빛의 거리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이 주요 내용. 반대 여론은 예상을 넘어설 만큼 격렬했다. "관광수입을 위해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는 행정"이라거나 "과거 침략국의 이름을 딴 거리를 왜 만들어야 하나"는 등의 비난이 들끓었다. 담당 공무원은 '매국노'로 찍혀 테러 위협을 받았을 정도. 결국 '일본인 거리' 사업은 시작도 하기 전에 무산됐다.

초량왜관의 자취를 없애려는 개발 계획도 있었다. 부산시는 지난 2008년 용두산 공원을 민자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가 '역사성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고 물러섰다.

복원 공간 확보 또한 풀리지 않는 숙제다. 부산민학회 주경업 회장은 2007년 1월 큰 충격을 받았다. 부산시가 '초량왜관 전시관'으로 활용하기 위해 매입하려던 부산유치원(1534㎡) 건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 알고 보니 민간 소유주가 사찰을 짓겠다며 철거 중이었다. 주 회장은 "부산유치원은 최초의 공립유치원이자 초량왜관의 사찰인 동향사(東向寺)가 있던 자리다. 이만큼 상징성을 가진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허탈해했다.

2002년 관수가(부촌) 오른쪽 모텔 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일본식 석축도 마찬가지. 조선 후기 또는 일제강점기 유적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사유재산권 침해'를 주장하는 건축주의 목소리에 묻혀버렸다.

"무엇이 초량왜관의 흔적인 지 조차 알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정밀조사가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최소한 건물을 신축할 때만이라도 건축주의 양해를 얻어 지표조사를 해야 합니다." 부산박물관 나동욱 학예사의 제안이다.

■전쟁과 평화의 두 얼굴

초량왜관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일본의 조선 침략과 맞닿아 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는 1580년 일본 왜승 현소(玄蘇)가 부산포를 거쳐 한양으로 상경한 '왕환일기(往還日記)'의 경로를 따라 조선을 침략했다. 이후 메이지 정부도 초량왜관을 대륙침탈의 염탐기지이자 군사거점으로 삼았다. 민족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역사적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는 셈이다.

조선이 부산포에 첫 왜관(범일동)을 설치한 것은 1407년(태종 7년). 도쿠가와 막부의 끈질긴 요구에다 왜구를 회유하려는 조선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물이었다. 임진왜란으로 폐쇄됐던 부산포왜관은 절영도왜관(영도·1601~1607년)→두모포왜관(수정동·1607~1678년)→초량왜관(1678~1876년)을 거치면서 유례없는 '평화의 시대'를 누린다. 일본이 허준의 '동의보감'과 인삼 모종을 빼돌려 대량 생산에 성공한 시기이기도 하다.

초량왜관이 전쟁의 굴곡을 맞은 것은 1873년. 이때 메이지 정부는 군사력을 앞세워 초량왜관을 강제 '접수'한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1876년에는 일본인 전관 거류지로 귀속시켰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을 삼킨 일본은 부산 앞바다를 매립해 근대적인 항구를 건설한다. 관수가 역시 일본영사관(1880년)과 이사청(1906)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09년 부산부청사가 신축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국건축역사학회 회장인 목원대 김정동(건축학) 교수는 "초량왜관은 한일 평화의 거점이면서 침략의 교두보였다는 상반된 가치 때문에 평가가 소홀했다"면서 "반면 일본에서는 전쟁이 아니라 문화를 교류한 친선의 장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고 소개했다. 국내의 엇갈린 역사관 못지않게 한일의 인식 또한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다.

■'어떻게 복원하나'도 엇갈려

국내에는 아직 초량왜관 설계도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원형을 알 수 없으니 무작정 복원에 나설 수도 없는 처지. 1675년 착공된 초량왜관은 조선인 125만 명(연인원)과 일본인 목수 2000여 명이 동원된 대역사였다. 전문가들은 건물이 동서 450칸(1칸은 약 2m)과 남북 250칸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용두산을 가운데 놓고 동관 3대청인 관수가·개시대청(사무역 장소)·재판옥(외교 교섭관)과 사신이 머물던 객사인 서관 3대청(일특송옥·참판옥·부특송옥)이 들어섰다. 건축 규모가 방대하고 사료마저 부족하다 보니 연구가 매끄럽지 않았다.

반면 일본에선 건축·수리과정까지 상세히 기록된 '대마도 종가문서'가 1970년대 발굴됐다. 게이오대 다시로 가즈이(田 代和生) 교수는 저서 '왜관'(논형, 2005년)에서 "조선식 건축과 일본식 건축이라는 두 가지 형태의 건물을 짓기 위해 두 나라 목수와 인부가 공동작업을 했다"고 발표했다. 한일 합작품이라는 뜻이다. 초량왜관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음 복원한 재일동포 부학주(게이오대 강사) 박사의 견해도 비슷하다. 동·서관의 지붕은 '대담한' 조선식이었지만 다다미나 목욕탕 등 실내는 '섬세한' 일본식이었다는 것이 그의 연구 결과.

반면 일부 연구자들은 "왜관 건물은 대부분 일본식이라는 사료가 많다"고 주장한다. 한·일 학문교류는 물론 역사·건축·민속분야 전문가들의 공동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강남주 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장은 "부산 근대사가 갖는 불가피한 이중성과 엇갈린 시선을 정리해 미래를 여는 좌표로 활용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직면한 과제"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