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日 사신·상인 등 500~1000명이 상주
- 두 나라 문화 충돌하고 끝없이 융합했던 곳

- 왜검법 밀반입, 부산요 제작·수출, 조선인삼 종자 밀반출…
- 흥미로운 조·일 교류사 뒷얘기도 널려 있어

- 꿈틀대는 생생한 역사…교육·문화상품으로 특화하기 안성맞춤

덴마크의 미래학자 롤프 옌센은 미래를 '스토리(story)의 시대'로 정의했다. 금융의 중심 월스트리트가 휘청대도 미국이 건재한 배경에는 스토리 산업의 심장인 할리우드가 있다.

초량왜관(1687~1876)은 부산이 특화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의 보물창고다. 개혁군주 정조가 군사훈련에 사용한 '무예 24기'나 ▷동의보감과 인삼의 일본 밀반출 ▷일본 최고위층도 원했던 부산요 도자기는 모두 한일무역의 거점이었던 초량왜관 200년사와 맥이 닿아 있다. 영화·출판을 비롯한 문화상품의 소재가 무궁무진한 것이다. 왜관 복원의 의미가 '조선시대 일본인이 살던 건물 몇 동 재현한다'는 식으로 축소되선 안되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한·일 교류사의 뒷이야기를 교육·문화상품으로 개발해 '살아있는 역사'로 복원하는 데까지 영역을 확장하자"고 제안한다.

■ 왜관과 정조의 무예 24기

조선시대 정조가 군사훈련에 사용한 무예 24기 가운데 왜검(倭劍)은 초량왜관이나 조선통신사 행렬과 연관이 깊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수원화성문화제에서 펼쳐진 무예 24기 공연 장면. 국제신문 DB

수원화성 행궁에서는 월요일을 뺀 매일 오전 11시 조선 무사들의 무예 24기 공연이 펼쳐진다. 말 탄 병사들의 창이 하늘을 찌르고 칼이 허공을 가를 때 마다 '와아~'하는 감탄사가 흘러나오기 마련. 정조의 개혁정신이 집약된 수원화성은 정예부대 장용영 무사들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수록된 24기를 수련한 한국무예의 성지이기도 하다.

특히 '무예도보통지'의 십팔기(十八技)에 등장하는 '왜검(倭劍)'은 초량왜관·조선통신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금석학의 대가인 유본학(1770~?)의 '김광택전'을 보면 "숙종 때 군교(軍校) 김체건이 왜관에 노비로 잠입해 왜검을 익혔다"는 기사가 나온다. 또 '무예도보통지'에는 김체건이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으로 가 왜검을 배워 숙종 앞에서 시연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역사학계에선 김체건이 1669년 6월에서1680년 3월 사이 왜관에 잠입했고 숙종 8년(1682년)에는 통신사를 따라가 검보를 얻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귀국한 김체건은 왜의 검법에다 교전보(交戰譜)를 추가해 우리 것으로 재창조했다. 그의 무예는 아들 김광택을 거쳐 정조 때 무예의 달인 백동수(1743∼1816)에게 전해져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다.

김체건이나 백동수를 소재로 다룬 역사서나 소설은 최근 5년 사이 5권 넘게 발간됐다. 수원화성 역시 무예 24기를 문화상품으로 개발했다. 초량왜관과 조선통신사의 중심인 부산이 선수를 뺏긴 셈이다.

■ 인삼 유출사건과 일본 근대화

일본에선 에도(도쿄) 막부 제8대 쇼군(장군) 도쿠가와 요시무네(1684~1751) 집권 시절 조선 인삼 투기열풍이 불었다. 인삼 소매가격은 1700년(숙종 26년)께부터 폭등하기 시작해 요시무네 시절엔 인삼 1근(600g) 가격이 금 24냥까지 치솟았다. 당시 조선 정부는 일본내 인삼 공급량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다.

허준의 '동의보감'에 매료된 요시무네는 초량왜관의 무역을 담당하던 대마도에 '조선 인삼 종자를 빼돌려 국산화하라. 동의보감에 나오는 조선 약재를 조사하라'는 국책 프로젝트를 지시한다. 마침 1721년 조선 역관 최상집이 인삼 밀무역을 하다가 대마도에서 잡혔다. 최상집은 밀무역을 눈 감아주는 대가로 인삼 밀반출과 약재조사에 협력한다.

결국 대마도가 헌상한 총 35뿌리의 인삼의 생초·생근은 일본이 '오타네닌징'이라 부른 국산인삼의 대량 생산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러한 사실은 1970년대부터 '대마도종가문서'를 연구해온 다시로 가즈이 일본 게이오대 교수가 쓴 '왜관'(논형)에 소개돼 있다. 가즈이 교수는 18세기 전반에 일본이 전개한 한반도 약재조사는 각 방면에서 이뤄진 일본 근대화의 토대가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 왜관 소재 한일 합작 영화 추진

초량왜관에는 500~1000여 명의 일본 사신과 상인들이 항시 거주했다. 조·일 문화가 상시 충돌하고 융합하는 장소였던 만큼 이야깃거리도 풍부하다. 옛 사료를 보면 당시 부산과 김해에는 일본식 접부채를 소지하거나 스끼야끼를 즐기는 풍조가 나타났다. 대마도에서 파견한 우두머리인 관수(館守)가 쓴 기록에는 18세기 후반 호랑이 2마리가 왜관 담장을 넘어왔다는 얘기도 나온다.

왜인이 조선 여자와 통정을 하다 외교 마찰을 빚기도 했다. 이른바 교간(交奸)사건이다. 숙종실록에도 '일본인이 초량촌을 몰래 드나들면서 부녀자와 간음하여 동래와 부산의 주민 가운데 일본인 아이가 많다'고 적고 있다. 당시 초량왜관은 철저한 금녀(禁女)구역이었다. 유사한 사건이 계속 발생하자 조선은 1711년 통신사의 일본 방문을 계기로 시묘약조 3개조를 체결한다. 조선 여인과 일본인들의 정사를 방지한다는 것이 약조의 골자다.

초량왜관을 소재로 다룬 한·일 합작영화의 제작도 추진되고 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가 지난 2008년 일본 시즈오카현 이토의 호텔에서 주최한 '제2회 한-일 비즈니스 캠퍼스'에서는 초량왜관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비밀을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가 파헤치는 '바람의 시대'가 우수상을 받았다. 영진위는 이 작품이 영화화될 경우 시나리오 번역을 지원할 예정이다.


# 조·일 합작 도자기 제작소였던 '부산요'

- 왜인 기술자 파견, 두모포왜관에 1639년 첫 설치
- 생산된 조선 사발 나가사키항을 통해 네덜란드까지 수출
- 복원 땐 좋은 관광자원

초량왜관의 부산요에서 제작된 인화문 찻사발.

고혼자완(御本茶碗). 일본에서 부산사발을 일컫는 명칭이다. 이 사발은 일본의 주문에 따라 제작되었으나, 조선의 흙으로 조선의 사기장이 빚어서 일본에 보낸 'Made in chosun'이다.

왜인들은 조선 사발을 좋아했다. 일본에서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 또는 다완(茶碗)전쟁이라 부르는 이유다. 왜인들은 동래부에 통사정하여 왜관에 가마를 설치해줄 것을 요구했다. 1639년 두모포왜관에 마침내 '부산요(釜山窯)'가 탄생한다. 부산요는 1678년 초량왜관 속으로 들어가 1743년까지 생산기지가 된다.

에도(東京)의 쇼군(장군)들은 대마도를 통해 부산요에 도자기를 주문했다. 대마도에서는 다두(찻사발을 선별하는 심미안이 높은 차인)와 도공두(사기장의 우두머리) 나아가 그림, 조각, 불을 담당하는 왜인을 부산요에 파견했다. 쇼군들은 부산요에서 나온 다기를 특히 아꼈다. 조선의 솜씨 좋은 사기장들이 제작에 가세, 자연스럽게 한일 도자기 합작 프로젝트가 되었다. 부산요에서 만든 사발들은 나가사키항을 통해 네덜란드로 수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의 불만이 없지는 않았다. 백토와 옹기토, 유약의 원료인 물토와 약토, 나무 등 도자기 재료를 조선에서 공급해야 했기 때문. '실록'에는 일본 기술자들과 조선 사기장들이 문화 차이로 자주 다툼을 벌여 이를 금지하는 표지판이 세워지기도 했다고 전한다.

1872년 왜인의 동래 침입에 대한 항의로 조선은 초량왜관을 폐쇄한다. 그후 조선의 국운이 기울면서 초량왜관은 일본에 강제로 접수됐고, 부산요가 자리했던 용두산 부근은 일본인 거리로 바뀐다.

부산요는 소설의 소재로도 등장했다. 현역 도예가인 신한균 씨는 '신의 그릇'(아우라·전2권)이란 소설에서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사기장의 파란만장한 삶을 흥미진진하게 복원해냈다. 주인공 신석은 왜장이 주문한 그릇을 만들다가 일본으로 끌려간다. 사무라이 도공에 봉해진 그는 부산 왜관요의 책임자가 되어 40년만에 귀국, 마침내 조상을 위한 황도를 빚게 된다는 줄거리다.

부산요는 '타오르지 않는 가마'다. 광복동 거리에 '부산요' 안내판이 세워져 있긴 하지만 의미를 아는 시민은 거의 없다. 부산의 '부(釜)'가 '가마'를 뜻하는 만큼, 부산요에 불을 때면 의미심장한 관광자원이 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