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건축 백미 화홍문 1922년 대홍수에 소실
- 수원 백성들 힘으로 10년만에 복원 성공

- 화성행궁 복원도 문화계 인사들 주축, 1989년 추진위서 시작
- 모자라는 재정 모금에 시민단체들까지 나서 국민신탁 운동 추진

- 초량왜관 복원 역시 민·관 협력이 최우선… 부지매입 서둘러야

경기도 수원시가 1990년대 중반부터 복원에 나선 화성행궁 전경.

"동문은 도망가고, 북문은 부서지고…."

세계문화유산인 경기도 수원화성은 한국전쟁 당시 잿더미로 변했다. 무차별 폭격에서 살아남은 문화재는 서문과 남문 정도. 임금의 임시 거처인 화성행궁도 일제시대 대부분 파괴됐다. 1974~79년 박정희 정부가 무너진 성곽 5.7㎞를 보수하기는 했지만 건축물 복원은 30년 가까이 제자리 걸음이었다.

조선 최초의 신도시인 화성이 본격 복원된 시기는 1996년. 도시재생 키워드로 '화성'을 선정한 수원시는 작년까지 총 5000억 원을 쏟아부었다. 화성이 완공된 정조 21년(1797년)을 기준으로 현재까지 ▷성내 시설 33만 평 가운데 20% ▷성외시설 70% ▷성곽시설 82%가 복원된 상태. 2020년까지 1조5000억 원의 재원이 더 필요할 것으로 추정된다. 수원지역 문화·시민단체들은 넉넉치 않은 수원시의 재정을 돕기 위해 지난해 8월부터 문화유산 국민신탁 운동에 나섰다.

부산이 초량왜관을 복원하려고 한다면 눈여겨 보아둘 대목이다.


■민간이 주도한 '화홍문' 복원

사진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된 화성의 모습을 1950년대 중반 촬영한 것이다. 수원박물관·수원화성박물관 제공

화성 복원의 역사는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2년 대홍수가 전국을 강타했다. 수원천 수량을 조절하던 북수문인 화홍문(華虹門)과 남수문도 거센 물살에 속절없이 파괴됐다. 화홍문은 1897년 대한제국이 국폐(國幣)에 도안으로 새긴 조선 건축의 백미. 당시 수원 백성들은 '수원명소보존회'를 결성해 화홍문 복원에 나선다. 이름없는 민초들과 기업인들이 모금에 동참했다. 마침내 대홍수 10주년인 1932년 5월 화홍문 누각이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수원박물관 한동민 학예팀장은 "화홍문 복원은 우리 문화사에 남을 사건이자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의 모범 사례로 꼽힐만 하다"고 소개했다.

현재 진행 중인 화성 복원사업도 1989년 문화계 인사들이 주도한 '화성행궁 복원 추진 위원회'에서 추동력을 얻은 것이다. 1993년 '화성행궁 복원 장기계획'을 발표한 수원시는 1996년부터 화성행궁터에 있던 수원의료원·수원경찰서·여성회관 건물을 외곽으로 이전했다. 성곽 내외 낙후지역 3만 여평을 매입해 공원화하는 성과도 거뒀다.

경성대 강동진(도시공학) 교수는 "민·관의 유기적 협력은 인내가 필요한 문화재 복원의 핵심 과제"라면서 "초량왜관 복원 역시 민간 전문가와 지주들의 동참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사)화성연구회·수원사랑포럼·수원환경운동연합은 ▷화성 건축물 모니터링 ▷화성 바로알기 강좌와 학술대회 ▷홈스테이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완벽한 설계도 '화성성역의궤'

화성 복원의 결정적 열쇠는 세계기록유산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라는 설계도였다. 정조의 명령과 화성 축성 설계도가 상세히 수록된 탓에 문화재 복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원형'을 고스란히 재현할 수 있었다. 지난 2008년에는 프랑스 동양어학교 도서관에 보관돼 있던 한글본 '뎡늬의궤(整理儀軌)'가 발굴되기도 했다. 총 12권 12책 분량인 한글본은 한자본에 실린 지명과 건축기술의 의미를 정확히 보여준다.

하지만 초량왜관은 건물의 배치와 양식을 보여주는 설계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변박의 왜관도(1783년)를 비롯한 그림 20여 점만 전해 내려온다. 학계에서도 초량왜관 복원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분위기지만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부산대 김동철(사학과) 교수는 "초량왜관 연구는 대부분 외교·문화·무역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구체적인 복원 밑그림에 대해서는 사료나 연구가 부족하다"고 털어놨다.

초량왜관이 한국 건축사에서 아웃사이더였던 셈이다. 여기다 단순히 초량왜관만 복원할 것이냐, 아니면 용두산공원에 산재한 근대유산 복원의 큰 틀 속에서 다룰 것이냐에 대한 공감대 형성도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다.


■국비 암초에 주춤한 '화성 재창조'

김용서 수원시장은 지난해 1월 화성을 방문한 유인촌 문화관광부 장관을 붙잡고 늘어졌다. 수원행궁을 직접 안내한 그는 "화성 복원을 위해 정부가 특별법을 제정해 지원해 달라"고 통사정지만 유 장관은 뚜렷한 대답을 내놓지 않고 돌아섰다.

15년을 달려온 화성 복원의 최대 걸림돌은 재정난이다. 화성 복원 예산의 80%를 수원시가 충당하는 구조가 발목을 잡은 것이다. 실제로 작년까지 투입된 5000억 원 가운데 국비(208억원)와 도비(648억원)의 비중은 16.5%에 불과했다. 지난해 화성 복원 예산 131억 원 역시 국·도비 비중은 20%(26억3600만원)에 그쳤다. 여기다 한나라당 남경필 의원이 17대 국회에서 발의한 '세계문화유산 도시 조성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도 회기종료로 자동폐기됐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500억 원 이상의 복원사업은 대부분 중단됐다. 당장 화성 안쪽에 있는 8개 초·중·고(10만7424㎡)의 성밖 이전이 지지부진한 상황. 결국 수원시는 학교 이전 사업을 2017년 이후로 미루기로 잠정 결정했다.

(사)화성연구회 염동균 사무처장은 "화성 복원을 통해 수원시 전체를 리모델링하려는 계획이 복병을 만나 주춤하고 있다"면서 ▷성금 모금 ▷국민신탁 브랜드를 부착한 관광상품 매장 운영 ▷기업의 문화유산복원 기부 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직 첫 발도 떼지 못한 초량왜관 복원사업이 참고해야 할 부분이다.


# 네덜란드 상인 전관거류지 日 나가사키시의 데지마, 60년 째 문화유산 복원 중

일본 나가사키시가 복원한 데지마.나가사키시 제공

일본 나가사키시의 데지마(出島)는 쇄국기인 17~19세기 황량한 개펄에 세운 인공섬. 200년간 네덜란드 상인의 전관거류지였다가 메이지시대 매립됐다. 크기는 초량왜관의 1/10인 1만5000㎡(5000평). 1950년부터 60년 가까이 복원이 진행 중이다. 국내 문화유산을 야기할 때마다 데지마가 거론되는 이유다.

반면 '데지마 따라하기'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일본 근대화에 긍정적 기능을 한 데지마와는 달리 왜관은 '교류'와 '식민'의 이중적 공간이었던 탓이다. 한국해양대 이지훈(44·철학) 박사는 "역사적 배경이 다르지만 수 십년에 걸친 문화유산복원 과정은 인상 깊다"고 말했다. 배울 것은 배우자는 의미다.

데지마 복원은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5년 미군의 원자폭탄 투하로 폐허가 된 나가사키는 생존의 기로에 놓인다. "원도심을 재개발하려 해도 고층건물에 대한 수요가 없었어요. 차라리 일본 첫 개항지를 복원해 관광을 일으키자는 목소리가 높았지요." 나가사키시 마타하리 가즈오 관광과장의 설명이다.

범시민적 관심도 뜨거웠다. 2006년까지 투입된 예산 130억 엔 중 7.2%인 10억 엔이 성금으로 충당됐다. 청사진인 '데지마 복원 정비구상'과 '데지마 상관터 복원 계획' 역시 민간 전문가들이 뼈대를 만들었다. 가장 큰 난제는 반세기가 걸린 사유지 매입. "1951년부터 지주와 점포의 상인들을 설득했어요. 시민사회의 공감대가 형성된 덕분에 투기는 없었습니다. "(데지마복원정비실 다이라 도시타카 계장)

2000년 첫 삽을 뜬 나가사키 시는 2006년까지 건축물 15개동과 인공섬을 감싼 돌담을 복원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라이덴 국립민족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19세기 데지마 모형과 전문가를 보냈다. 데지마 복원을 양국 우호의 계기로 삼은 것이다.

부산 출신인 나가사키 국제협력원의 백인재(29) 씨는 "2008년 유료관광객이 34만 명에 달했다. 이제 시가지 개조와 문화유산 복원은 떼어 생각할 수 없다"고 귀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