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량왜관 중심지였던 지금의 용두산 자락, 광복·남포동 일대 지표조사 법제화
- 유적 훼손 방지 시급

- 객사·관수가 있었던 동광동 부촌식당 일대 초량왜관 전시관 적지
- 옛 부산유치원 등 땅 매입도 서둘러야

- 당시 건축물 복원은 한일 공동연구 필요한 장기적인 과제
- 문화유산 국민신탁 등 범시민 운동으로 분위기부터 띄워야

초량왜관 복원은 결코 녹록치 않은 과제다. 복원은 역사적·실체적(건축적) 복원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규모를 넓히면 용두산 자락의 중구 지형을 통째로 바꿔야 하는 거대 도시계획이 될 테고, 간단히 접근하면 표지판이나 자료관 정도를 세워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우리 세대가 할 수 있는 일과 100년을 내다보는 장기 과제를 담은 마스터플랜부터 만들자"고 제안한다. 경기도 수원화성이나 일본 데지마(出島)처럼 미래를 내다보면서 '느리지만 제대로 된' 청사진을 그리자는 것이다.

■대마도에서 날아온 편지

부산박물관 나동욱 학예연구관(오른쪽)이 지난달 30일 부산 중구 동광동 백산기념관 뒷편에서 발견된 일본식 석축을 조사하고 있다. 용두산 자락에는 시기를 알 수 없는 수 많은 유적이 있지만 정확한 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다. 곽재훈 기자 kwakjh@kookje.co.kr

취재팀은 지난 연말 재일동포인 부학주(일본 게이오대 강사) 박사로부터 반가운 연락을 받았다. 그는 14~19세기 540년간의 역사를 수록한 '대마도 종가문서'를 토대로 초량왜관을 그래픽으로 재현한 전문가. "대마도의 미네마치 기사까 지역에서 19세기 건축된 민가를 발견했어요. 한·일 합작품인 초량왜관 복원에 귀중한 참고 자료가 될 겁니다."

부 박사는 초량왜관 건물의 지붕은 '조선식'이고 왜인이 거주했던 실내는 '일본식'이라고 주장하는 대표적 학자. 대마도 민가의 하부구조에 조선시대 전통 지붕을 얹어 건축물을 재현하자는 것이 그의 논리다. 부 박사는 "초량왜관 건축은 고온다습한 기후에 강한 일본과 추위에 강한 조선의 양식이 결합한 퓨전 양식"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학계는 이에 대해 신중하다. 초량왜관 건축사 연구가 미진한 상황에서 자칫 일본 논리에 휘둘릴 수 있기 때문. 인제대 정예정(건축학과) 강사는 "가늘고 긴 일본식 하부구조에 무거운 조선식 기와를 얹었다는 견해는 수용하기 힘들다"고 반박했다. 그는 또 "김해 번와소(燔瓦所)에서 기와를 공급한 것은 맞지만 어느 나라 양식으로 제작됐는가를 보여주는 기록은 발굴되지 않았다. 대마도가 초량왜관 건축 당시 150명의 대규모 목수단을 파견한 점도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지붕은 조선 건축에서 비중이 가장 컸던 공사다. 규장각에 보관된 '왜관수리등록'을 보면 대마도는 일식 기와인 헌선와(軒先瓦·처마 끝에 대는 둥근 기와)를 사용하게 해달라고 조선 정부에 끊임없이 요구한다. 25년마다 시행된 건물수리에 대해서도 연구가 필요하다. "최초의 건축양식이 그대로 유지됐다"는 주장과 "시간이 갈수록 조선식으로 바뀌었다"는 반론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 씨는 "건축물 복원은 한일 공동연구가 선행돼야 하는 장기 과제"라면서 "우선 초량왜관의 생활상이나 건물의 경계를 보여주는 이정표부터 세우자"고 제안했다.

■지표조사가 복원의 첫걸음

일본 게이오대 강사인 부학주 박사가 조선시대 지붕과 대마도에서 발견된 19세기 민가를 합성한 장면. 부 박사는 "초량왜관 건축물은 조선식과 일본식이 결합된 퓨전 양식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다.

지난 달 30일 부산 중구 동광동 백산기념관 뒷편. 낡은 상가를 철거하던 중 길이 10m의 석축이 발견됐다. 돌을 마름모꼴로 다듬어 올리는 견치석(犬齒石) 쌓기는 전형적인 일본 양식. 바로 옆에는 직사각형으로 쌓은 2m 정도의 석축도 나왔다. 한 장소에서 각기 다른 건축기술이 발견된 것이다.

부산박물관 나동욱 학예연구관이 석축 하단을 들춰봤더니 강 자갈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매립되기 전까지 해안가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석축의 건축시기에 대해 '판단유보'라고 밝힌 나 연구관은 "용두산 자락에는 시기를 알 수 없는 수 많은 유적이 숨어있지만 아직껏 전수조사를 한 적이 없다. 건물을 뜯거나 재건축할 때 만이라도 지표조사를 하도록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향토사료연구가 김한근(54) 씨는 "만약 석축 밑에서 뻘이나 모래가 나온다면 초량왜관과 해안의 경계선이라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초조사 못지 않게 시급한 과제는 사유지 매입이다. 부산대 김동철(사학과) 교수는 "도심이 형성된 탓에 비석 하나 세울 땅도 없다"고 한탄했다. 수원시가 화성 복원 예산 대부분을 사유지 매입에 사용하느라 재정난에 빠진 사실은 눈여겨 볼만하다. 일본 나가사키 시도 옛 데지마 부지를 사들이는데 50년의 세월을 보냈다.

주경업 부산민학회 회장은 "10만 평에 달하는 초량왜관 터를 모두 매입하기란 불가능한 만큼 상징성이 큰 곳부터 사들이자"고 주장했다. 일본 사신이 조선 국왕의 전패(殿牌·임금을 상징하던 나무패)에 인사를 올리던 초량객사나 관수가(대마도에서 파견한 초량왜관 우두머리의 거처) 터였던 중구 동광동의 부촌식당·아로마호텔부터 매입하자는 것이다. 지난 2007년 부산 중구청이 매입 협상을 하다 실패한 옛 부산유치원(1534㎡) 터는 초량왜관 전시관이 들어설 좋은 후보지로 꼽힌다.

■100년 내다보는 장기 계획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한 초량왜관 동관.

건축물 복원에 앞서 이뤄져야 할 것이 마스터플랜 작업이다. 초량왜관의 의미와 한·일 관계를 고려한 오늘날의 활용도, 미래의 가치를 담은 큰 그림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경성대 도시디자인연구실이 제작한 '원도심 근대문화지도'를 보면 조선이 설계한 초량왜관 배치도와 현재 도시구조가 거의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성대 강동진(도시공학) 교수는 "용두산 자락인 광복·남포동은 초량왜관을 중심에 놓고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부산 역사 바로보기 차원에서 초량왜관 아카데미도 열어보자"고 제안했다.

제주대 주강현(54·해양문화연구소장) 석좌교수는 "조선시대 한·일 교류 200년사의 의미를 살리려면 천편일률적인 테마파크 수준을 탈피해야 한다. 부산과 후쿠오카에 각각 저팬타운과 한인촌을 만들어 '현대판 초량왜관'으로 가꾸는 방안도 고려할 만하다"고 제안했다. 항구도시 부산이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품는 국제도시라는 콘셉트를 구현하는 전략의 하나로 초량왜관 복원을 활용하자는 뜻이다.

한나라당 정의화(중·동구) 의원도 생각이 비슷하다. 그는 "용두산 자락에 '저팬 타운' 또는 '리틀 도쿄'를 만들어 일본인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현실적 과제"라면서 부산시가 나서서 매듭을 풀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난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역문화 컨설팅 용역을 수행한 부산대 민병욱(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교수팀은 부산 원도심 부활을 위한 문화네트워크 구축을 우선 과제로 꼽았다. 원도심의 상징인 ▷초량왜관 ▷영도다리 ▷도심의 하꼬방 ▷책방골목 ▷자갈치시장 ▷돼지국밥 ▷용왕제와 근대역사 건축물 303동을 엮는 징검다리로 초량왜관을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다.

부산시도 용두산을 중심으로 초량왜관~일제강점기~해방~한국전쟁사를 아우르는 근·현대사를 역사문화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데엔 공감한다. 그러나 조선통신사 못지않은 역사·통상외교적 의미를 갖는 초량왜관에 대해선 무신경하다.

■내셔널 트러스트 불 붙어야

전문가들은 초량왜관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기 위해 '문화유산 국민신탁' 운동을 제안한다. 자발적인 모금이야말로 정부나 부산시의 정책과 예산 편성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산 강서구 둔치도는 내셔널 트러스트의 가능성을 이미 보여줬다. (사)100만 평 문화공원은 지난 2002년 둔치도 60만 평 가운데 1만3000평을 민간 성금으로 매입해 영원히 개발할 수 없는 보전자산 1호로 등록했다. 여론을 의식한 부산시는 2006년 둔치도 1만5000평(4만9800㎡)을 공원시설로 결정하고 농지 1만 평을 추가로 매입했다. 최근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둔치도를 '꼭 지켜야 할 자연·문화유산'에 선정하기도 했다.

수원에서도 '화성 복원추진 시민운동본부'가 내셔널 트러스트와 정부 지원 확대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사)화성연구회 염상균 사무처장은 "문화재 복원의 진정한 주체는 시민"이라면서 ▷성금 모금 ▷국민신탁 브랜드를 부착한 관광상품 매장 운영 ▷기업의 문화유산복원 기부 운동을 전개해 보라고 조언한다. 강동진 교수는 "우리 세대는 초량왜관 복원 마스터플랜 수립과 사유지 매입이라는 첫 발만 떼고, 나머지는 후대에게 미루는 것도 현명한 결정이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