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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요양원의 색소폰 연주 /박형섭

어버이날 때 옛 노래 선율로 기쁨과 위안 `선물`

이달이 가기 전 다시 들려드릴 것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11-05 21:11:12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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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내 발길은 즐겁게 해운대 달맞이 언덕으로 향한다. 언덕 아래 문탠로드에는 언제나 산책자들로 붐빈다. 그러나 내 발길이 향하는 쪽은 문탠로드 방향이 아니다. 그 위, 사람 사는 동네다. 언덕 위의 동네에는 크고 작은 집들과 길들이 있다. 거미줄처럼 얽힌 길들을 걸으며 사람 사는 모양새와 체취를 음미해보는 것은 문탠로드의 숲길을 걷는 것만큼이나 재미가 쏠쏠하다.

삼년 전이었다. 아마 봄이었던 것 같다. 다양한 형태의 빌라들을 지나 언덕길을 걷던 중에 노란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문화의 명소 달맞이 언덕에 노인요양소가 웬말이냐'. 대충 이런 문구가 씌어 있었다. 플래카드 건너편을 바라보니, '부산국제학교'옆에 '달맞이 노인요양원'이라는 간판이 입구에 부착되어 있었다. 빌라 형태의 5층짜리 건물이었다. 플래카드의 문구가 합당한 것인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입구 주차장으로 한 발 들여놓았고, 결국 건물 안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당시 나에게는 홀로 지내시는 집안 어른이 한 분 계셨고, 무의식중에 그분이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만한 장소를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날 이후 나는 한 달에 한 번 달맞이 요양원으로 향한다. 어른이 이곳에 머문 지 어느덧 3년째이다. 팔순을 훌쩍 넘긴 어른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늙음과 치매라는 존재의 병으로 고생하고 있다. 그러나 어른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극도로 병약해진 삶을 고생으로 여겨 절망하지 않고, 매번 만날 때면 눈물을 흘릴 만큼 반가워하면서도 미안해한다. 몸도 마음도 허약해지고 기억도 판단도 흐릿하지만 때때로 지난 시절의 꼿꼿한 성격을 드러내기도 한다. 나는 자존심이 살아 있다는 증거로 오히려 반갑게 받아들인다. 어른은 평생 신문애호가였기에 매일 신문과 잡지를 읽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거동하기 어려워져 요양원 생활을 하고 있지만 가능하면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어른은 일찍이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다섯 남매를 키웠다. 어른이 요양원 생활을 시작한 후 일상에 대한 걱정은 덜었지만, 과연 이것이 최선책인가 하는 질문에는 자식들 모두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옆에서 어떻게 하면 어른을 조금이라도 즐겁게 해드릴까 고민해왔다. 그러던 중 어른이 옛날에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친구처럼 의지했던 노래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가능하면 옛날의 기분을 되살려보도록 어른께 노래를 들려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어른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황성옛터', '봄날은 간다', '목포의 눈물'과 같은 명곡들을 뽑아내었다. 놀랍게도 노랫말 하나 어긋남 없이 또렷이 기억해 내며 박수까지 치면서 들려주시는 것이었다. 나는 흥을 북돋으며 어른과 눈을 맞추며 손뼉을 쳤지만, 가슴 속은 불이 붙은 듯 화끈거리기만 했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옆방의 할머니들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어른의 노랫소리를 귓속 가득 여운으로 담고 요양원 문을 나서며 불현듯 한 생각이 떠올랐다. 요양원에서 색소폰을 연주한다면? 고백하자면, 나는 색소폰의 황금색과 은은한 선율에 매료되어 배우기 시작한 지 3년이 된 상태였다. 멋진 연주 실력은 아니어도 정확한 음정으로 멜로디를 전할 수는 있었다. 취미로 익히는 악기지만 그것이 누군가에게 기쁨과 위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의 요양원에서의 색소폰 불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지난 5월 요양원에서는 어버이날을 맞아 나에게 특별한 부탁을 해왔다. 마침 어른을 위해 신청곡을 받아 연습해온 터여서 흔쾌히 수락했다. 요양원 관계자는 꼭대기 층 쉼터에 거동 가능한 모든 환자들을 모셨다. 나의 색소폰 연주는 한 시간 넘게 이어졌다. "'불효자는 웁니다' 한 번 듣고 싶구먼", "'선창'을 들려줘요", "'눈물 젖은 두만강'도 될라나" 여기저기에서 구수하고 활달한 옛 노래들이 신청곡으로 올라왔다. 색소폰 선율에 따라 가슴 훈훈한 축제가 벌어졌다. 복도에서 휠체어를 타고 흥얼거리는 분도 있었다.
그 날 이후 어른은 요양원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십일월이 가기 전에 색소폰 선율은 다시 한 번 달맞이 언덕에 울려 퍼질 것이다.

부산대 불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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