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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타계 30주기…새로 읽는 나림 명작] <10> ‘소설·알렉산드리아’

법에도 사각지대 있다…무고한 옥살이 없도록 경계하라

  • 정주아 강원대 국문학과 교수
  •  |   입력 : 2022-11-27 19:38:24
  •  |   본지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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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화 옥중기이자 1965년 등단작
- 일제 학병세대 콤플렉스 등 녹여
- 문학세계 ‘원형’… 대장정 첫걸음

- 이집트 도심 호텔 카바레 배경
- 獨·스페인 출신 사적 복수 다뤄
- ‘죄 있으나 결백한 자들’ 한풀이

나림 이병주(那林 李炳注, 1921~1992)의 등단작 ‘소설·알렉산드리아’는 100년 남짓한 한국현대소설사를 통틀어도 매우 이색적인 작품에 속한다. 이야기의 배경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주요 사건은 도심 호텔 고층에 자리 잡은 ‘카바레 안드로메다’에서 벌어진다. 한국인 독일인 스페인인 프랑스인 등이 대화를 나누고 논쟁을 벌인다. 이 소설이 발표된 시기는 1965년 6월이다. 해외여행을 통제하던 한국정부가 부분적으로나마 관광여권을 민간인에게 발급하기 시작한 것이 1983년이다. 그것도 ‘50세 이상, 200만 원 예치’를 조건으로 일 년 기한 단수여권을 내주었다. 이런 정황을 고려해본다면, 알렉산드리아 항구 풍경이라든가 다국적의 여행객과 중동 부호들이 모여든 휘황한 카바레 이야기는 당시 독자에게 얼마나 낯선 것이었을까.
이집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풍경. 나림 이병주는 알렉산드리아를 배경으로 한 ‘소설·알렉산드리아’를 1965년 6월 유력 종합월간지 ‘세대’에 발표하면서 작가로서 대장정을 시작한다.
‘소설·알렉산드리아’는 1960년대 유력 종합월간지였던 ‘세대’에 실렸다. 잡지 ‘새벽’의 주간이던 시인 신동문의 강력한 추천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새벽’에 최인훈의 ‘광장’을 실었던 인물이다. 반신반의하며 이병주의 원고를 검토한 ‘세대’ 편집장 이광훈은 잡지 총 지면의 4분의 1을 할애해 이 중편소설을 전재(全載)하기로 결심한다. ‘이병주 평전’의 저자 안경환 교수에 따르면, 이광훈은 본래 ‘알렉산드리아’로 돼 있던 원고 제목 앞에 ‘소설’이란 단어를 추가한 인물이다. 행여 독자에게 여행기로 읽힐까 저어하는 마음에서, 무엇보다도 ‘이런 것이 바로 소설’이라는 마음에서였다고 한다.

이병주는 자신의 등단작이 된 ‘소설·알렉산드리아’를 두고 2년 7개월의 감방 생활에서 얻은 ‘옥중기(獄中記)’라고 술회한 바 있다. 이병주는 ‘국제신보’(현 ‘국제신문’의 전신) 주필로 일하던 시절 필화를 입은 적이 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열린 정치적 공론장에서 이병주는 자신의 소신인 ‘중립화통일론’을 골자로 한 논설을 썼다. 이 글들로 그는 5·16 군사 정변 직후 ‘용공분자’로 지목돼 혁명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는다. 군부에서는 ‘조국의 부재’와 통일에 민족역량을 총집결하자’는 논설을 말 그대로 조국을 부정하고 통일을 위해 반공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의도로 보았던 것이다.

다행히 감형되기는 했으나, 무고한 옥살이에 대한 분노는 조금도 삭지 않았다. 게다가 당국의 감시 탓에 자유롭게 글을 쓸 처지도 못 되었다. 그에게 소설은 허구에 의지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다.

■ 이병주 소설의 ‘원형’

독자에게는 여행기로 오인될 염려가 있으나, 작가는 옥중기로 집필했다는 이 소설은 어떤 내용인가. 한국인 ‘나’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들어와 카바레 안드로메다의 악단 연주자로 일자리를 얻는다. 알렉산드리아는 언론인으로서 필화사건을 겪고 10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인 ‘형’이 동경해온 도시다. ‘나’는 숙소에서 만난 독일 남성 한스, 카바레의 댄서인 스페인 여성 사라 등을 알게 되고 이들 삶의 내력을 듣는다. 한스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군으로 징집됐다. 전쟁 후 귀환한 그는 동생이 유대인 친구를 숨겨주었다가 게슈타포에 밀고 당해 죽고,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어머니도 사망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십 년 넘게 밀고자를 뒤쫓은 끝에 한스는 알렉산드리아에 다다른 것이다. 사라는 스페인 내란 당시 게르니카 폭격에 의해 가족을 모두 잃고 고아가 됐다. 무려 삼십 년 전의 일임에도, 사라는 카페 안드로메다의 무희로 일하며 모은 돈으로 폭약을 사서 독일을 폭격하고야 말겠다는 복수심을 불태운다.

‘소설·알렉산드리아’는 이병주 소설의 ‘원형’이라 불리기도 한다. 필화로 고초를 겪은 언론인 출신 지식인, 즉 작가 자신을 연상시키는 인물이 후속작에도 꾸준히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보유한 진짜 중요한 ‘원형’적인 자질은 따로 있다. 바로 원한이라는 감정이다. 이 소설의 주요 인물 한스나 사라는 가슴에 원한을 품은 이들이다. 당초 독일인 한스에게 스페인인 사라는 맹렬한 증오심을 보이지만, 파시스트에게 가족을 잃고 오래 복수를 다짐해왔다는 공통점 때문에 의기투합한다. 결국 두 사람은 밀고자를 찾아내는 데 성공하고, 반성 따윈 모른 채 은신해왔던 밀고자는 죽음을 맞는다. 이런 복수담은 통쾌하지만, 대체 왜 통쾌한가를 되짚는 경우 이병주 문학이 품은 원한의 성격이 보다 분명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우선 원한과 복수가 아주 자연스러운 인과관계 속에 설정돼 있다는 점이다. 누구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원한을 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복수라는 행위의 영역으로 옮겨놓는 집념은 또 다른 문제이다. 대개는 마음에만 담아 두거나 시쳇말로 ‘정신승리’를 통한 자기합리화를 거쳐 타협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소설은 원한의 크기만큼이나 복수에 대한 욕망도 강렬하다.

사실 이 대목은 이병주의 글쓰기를 추동하는 ‘원한’의 역사적 기원과도 연결돼 있다. 이병주는 일제 말기인 1943년 ‘반도인 학도 특별 지원병제’라는 명목으로, 말은 지원이지만 사실상 징병당해 전장에 동원된 이른바 ‘학병세대’에 속한다. 이병주는 일본 군국주의에 저항하지 못하고 ‘노예이자 용병’으로 스스로를 팔아버렸다는 자의식에 평생 시달렸다. 그에게 4·19혁명이란 비로소 조국을 위해 일할 기회가 열린 것이기도 했다. 적을 위한 전쟁에 목숨 걸어야 했던 자기 운명에 대해 보상 심리가 발동한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중립화통일론은 이런 충심의 한 형태이다. 그런 마음이, 국가의 안위를 위협한다는 혐의를 받아 다시금 국가로부터 내쳐진 것이다. 이에 이병주가 느꼈을 권력자를 향한, 혹은 자기 운명을 향한 절망의 깊이는 감히 헤아리기 어렵다. 원한은 속으로 삭이면 노예의 자질이지만 행동을 뒷받침하면 주인의 자질이 된다. 이에 원한은 이병주의 문학을 낳고, 복수의 집념은 이병주의 쉼 없는 글쓰기를 지탱한다.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 일부. 이 그림의 소재가 된 사건은 ‘소설·알렉산드리아’ 속 사라 안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 나림 문학의 키워드 ‘법’

이 소설의 복수담이 어디까지나 ‘사적인’ 복수를 다룬다는 점도 흥미롭다. 결말에서 한스와 사라는 알렉산드리아 법정으로 끌려간다. 이들을 옹호하는 언론 및 변호인의 논변은 이병주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된 부분으로 이 소설의 백미이다. 무죄 주장의 논리는 이러하다. ‘한스는 독일인이면서 독일 게슈타포에 의해 가족을 잃은 인물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아이히만을 단죄할 법정이라도 있었지만 한스에게는 그럴 기회조차 없다.’

실제 이 소설은 억울한 죽음에 대해 항변할 곳이 없는 존재들을 대변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체제 내의 이념적 억압 탓에 민족이나 국가의 이름으로 신원(伸冤)을 요구할 수 없는 ‘체제 내부의 희생양들’을 가리킨다.

학병으로 ‘징병’됐음에도 적을 도운 배신자 취급을 받은 학병들, 사상범으로 투옥되어 사형당한 언론인과 시민운동가들, 한국전쟁기 양민학살사건 수사를 요구하다 용공으로 내몰린 유가족들. 훗날 유신정권이 끝난 뒤 이병주는 ‘그해 오월’(1982)이라는 소설을 통해 이들에게 구체적인 형상을 부여했다.

나림 이병주의 문학세계를 흥미롭게 만드는 키워드가 바로 ‘법’이다. 이병주는 당대 법 제도와 그 법이 구현되는 방식에 예민했던 작가이다. 이병주 자신도 혁명재판에 의해 구금되었듯 군사정권이라 해서 법 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군사정부가 1961년 5월 16일부터 1963년 5월까지 831개의 법률을 만들었으니, 거사 직후 유예기간과 공휴일을 빼면 실로 하루에 법률을 두 개 이상 만든 셈’이라 일갈한 적도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법정은 법의 사각지대를 대변하는 한스와 사라에 대한 판결을 보류하고 추방령을 내린다. 법 집행의 오만함에 대한 경계는 이 소설의 최종 주제이다. ‘죄 있으나 결백한 자들’의 신원을 위한 기록, ‘소설·알렉산드리아’는 그 대장정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공동기획:국제신문·부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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