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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산사에도 가을이 내려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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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변하는 세상, 변하지 않는 작은 것들을 사랑하고 싶다.
새벽에 차를 몰아 어두운 길을 달린다. 도로 위에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뿐이다. 가사에 담긴 애틋함이 유난히 마음에 와 닿는다. 뜻밖에 눈물이 고인다. 노래 한 곡이 오래 묻어 두었던 기억을 깨운 것일까. 지나온 시절의 풍경이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진다.
차창 밖으로 들녘이 서서히 밝아온다. 가을빛이 번지는 풍경을 바라보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산을 오르는 일은 단지 높은 곳에 이르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일상에서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마음을 마주하고, 오래 품어 온 그리움과 애틋함을 가만히 꺼내 보는 일이기도 하다.
산 중턱에 자리한 절 앞에서는 발걸음을 멈춘다. 마음 속에 쌓인 질문들을 풀어놓고 싶어서였을까. 대웅전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합장한다. 무엇을 간절히 바랐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렇게 두 손을 모으고 나면 마음속 어딘가에 작은 위안을 채운다. 산속의 절은 왜 이토록 따뜻할까. 오랜 세월을 견뎌 온 나무와 기와,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돌 하나까지도 저마다의 시간을 품고 있다. 가을의 산사(山寺)는 더없이 고풍스럽다. 그곳에 놓인 모든 것들이 변함이 없다. 변하지 않으니 오래 머물게 된다.
오래된 나무들이 드리운 길을 걷는다. 세월이 새겨진 나무의 결을 바라보고,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는 경쾌하다. 산행에서 만난 인연이 유독 깊게 느껴지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같은 길을 걷고, 같은 풍경 앞에서 멈추며, 서로의 숨소리와 땀방울을 나눈다.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순간이 있다. 산을 오르는 일은 삶을 살아가는 일과 닮았다. 정상에 이르는 길이 늘 순탄하지 않듯 인생에도 뜻대로 되지 않는 고비가 있다.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마침내 제자리에 서게 된다. 산은 우리가 흘린 땀에 풍경으로 답하고, 견뎌 낸 시간에 마음의 평온으로 보답한다. 그 보상은 물질적인 성취와는 다른 것이다. 제 힘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다는 사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고 변함이 없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책이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우리를 흔들지 못한다면, 대체 왜 읽고 있는 거지?’ 프란츠 카프카의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 중.
카프카는 폴락에게 보낸 편지에서 책이 우리를 흔들어 깨우지 못한다면 왜 읽어야 하겠느냐고 물었다. 책은 때로 익숙한 생각을 뒤흔들고, 외면하고 싶었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한다. 나에게 책은 하루를 버티게 해 주는 작은 숨구멍인지도 모른다. 숨 가쁘게 흘러가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무심히 지나쳤던 세상의 아름다움을 다시 발견하게 하는 힘이다.
책이 없다면 변하지 않는 가을의 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을까. ‘시몬, 너는 아느냐, 낙엽 밟는 소리를’. 오래전부터 전해 오는 이 시구가 마음에 와 닿는 것은 낙엽 소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 사라져 가는 것에 귀 기울이는 마음이 우리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은 그렇게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게 한다. 늘 곁에 있던 풍경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무심히 지나쳤던 순간에 오래 머물게 한다.
박준 시인의 시를 떠올리며 생각한다. 세상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져도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들의 속도까지 빨라질 필요는 없다고. 계절은 저마다의 시간을 따라 바뀌고, 나무는 서두르지 않은 채 잎을 틔우고 떨군다. 길고양이는 말 없이 눈빛을 건네고, 시골 어느 길가의 조릿대는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제자리를 지킨다. 그 작은 것들은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서지 않는다. 다만 그곳에 존재하며 자기만의 시간을 살아간다. 어쩌면 우리가 지켜야 할 삶의 모습도 그와 닮아 있지 않을까.
계절도 흐르고 인생도 흐른다. 한때 간절했던 것이 희미해지고, 익숙했던 풍경도 묵직하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변하는 가운데서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것이 있다. 새벽 길에 들었던 노래 한 곡, 산 중턱의 작은 절에서 모았던 두 손, 낙엽 밟는 소리, 책 속에서 만난 한 문장, 말 없이 건네는 누군가의 안부.
나는 그런 작은 것을 더 오래 사랑하고 싶다. 서두르지 않고, 쉽게 지나치지 않으며, 그 안에 담긴 시간을 헤아리고 싶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들을 사랑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