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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4> 나라의 첫 번째 본분은 국방

봉수대 선 치원은 당나라 황소의 난 진압 때를 떠올렸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2-23 19:04:10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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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소 너에게는 큰 죄 만 있고
- 속죄 할 작은 선행들조차 없어
- 귀신도 널 죽이기로 의논했다’
- 어르고 달래며 써내려간 격문
- 적의 기세를 단숨에 꺾었으니…

- 간비오산 정상 올라 내려다 보니
- 최일선 수군기지 해운포·수영만
- ‘외적 침입은 백성을 고통케 하니
- 국방 책임이 나라의 첫 과업이다’

- 따뜻한 차에 띄운 동백꽃 한송이
- 붉고 푸른 기운에 흰구름 품었네
- 차 이름 ‘해운동백차’라 칭했다
   
오랫동안 한반도 동남쪽 최일선의 초소로서 해운포와 수영만 일대를 지켰던 해운대 장산 자락에 위치한 간비오산 봉수대. 지금은 무분별한 도시계획으로 흉칙하게 들어선 마천루에 의해 해안 조망마저 사라졌다. 김성효 선임기자 kimsh@kookje.co.kr
■‘싸우지 않고 적의 기세 꺾다’

직접 전장에 나아가 창칼을 휘두르지는 않았어도 적에 맞선 적은 있었다. 당나라 ‘황소의 난’ 진압사령관이었던 제도행영병마도통(諸都行營兵馬都統) 고병의 종사관으로 표(表)·장(狀)·서(書)·계(啓) 등 전장을 오가는 모든 군령을 관장하고 작성하였으니 글로 맞선 것이다. 하여, 전쟁의 흐름을 읽고 대응하는 방책을 알기에 충분했다.

난은 당 희종 연간인 875년 과도한 세금 부과에 항거해 왕선지, 황소 등이 일으켜 880년에는 수도 장안(長安, 현재 서안)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처럼 반적이 기세등등할 때 치원은 고병에게 손자병법의 겁박전술을 건의했다. 이는 직접무력이 아닌 방법으로 위협하여 적이 두려움으로 전의를 잃게 하는 것이니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책이었다. 이에 고병은 치원에게 항복의 격문을 짓게 하니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써 881년 7월 적장에게 날렸다.

‘광명 2년 7월 8일 제도도통검교태위(諸道都統檢校太尉) 모(某)가 황소에게 고한다’로 시작하는 격문을 읽던 황소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죄만 있고 속죄할 수 있는 작은 선행조차 없으니 천하의 사람 모두가 너를 죽일 생각을 할 뿐만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도 이미 몰래 죽이기로 의논하였을 것이다’라는 대목에 이르러 혼비백산한 나머지 침상에 쓰러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니 싸우지 않고 적의 기세를 꺾은 것이었다.

■최치원의 ‘격황소서’

   
최치원이 고병의 막하에 들어간 것은 그가 회하(淮河) 남쪽지역을 관장하는 회남절도부대사(淮南節度付大使)로 있던 879년이다. 종8품 관역순관(館驛巡官)의 직을 받아 조세징수, 곡물운송, 운하관리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880년 고병이 ‘병마도통’으로 난 진압의 책임을 맡자 종7품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가 이듬해 종6품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랐으니 24세 나이였다. 도통순관은 중앙관직으로 위로는 황제와 재상에게 전황을 보고하고, 아래로는 각 군영의 장수에게 군령을 작성해 보내는 직으로 참으로 막중한 자리임에도 외국인 청년으로 발탁되었던 것이다. 능력의 출중함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격황소서’는 모두 1050자로 작성됐다. 치원은 먼저 세상의 도를 들어 옳고 그름을 말한 뒤, 반적이 실패한 역사의 사례들을 들며 ‘너는 스스로 독한 기운을 품고 올빼미 소리를 거두지 않은 채 사람을 물어뜯고 주인에게 짖어댄다’고 꾸짖었다. 또 ‘폭풍은 아침이 지나기 전에 그치고, 소나기는 하루가 지나기 전에 그친다’는 ‘도덕경’과 ‘하늘이 잠시나마 착하지 않은 자를 도와주는 것은 복을 주려함이 아니라 그 흉악함을 두텁게 하여 벌을 내리려 함이다’라는 ‘춘추전’의 글귀를 들어 경고했다.

‘다만 생명을 아끼고 살상을 싫어하는 상제(上帝)의 깊은 인덕’으로 항복을 권하고 용서를 말하면서, ‘만약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항거한다면 곰과 표범을 때려잡았던 군대로 하여금 한 번의 지휘로 쳐부수어 멸하게 할 것이니’ ‘너의 몸은 도끼의 기름이 되고…배에 불이 붙으면 필히 배꼽을 물어뜯어도 이미 때는 늦다’고 겁박했다.

실로 고금의 역사와 문장, 사상에 달통하지 않고서는 써낼 수 없는 데다, 어르고 달래면서도 단호하게 꾸짖고 경고하는 힘찬 문체는 적장의 등골을 단박에 서늘하게 할 만했으니 길이 남을 명문이었다.

치원은 그 공으로 종5품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에 제수되었다. 어사대(御史臺) 소속으로 관리를 감찰하고 시정의 풍속을 바로잡는 관직이었다. 또한 황제로부터 자색(紫色) 장복(章服)과 금색(金色) 어대(魚袋)를 하사받았으니 궁궐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해운동백차의 유래

   
지금은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동백섬의 수영부두. 국제신문DB
“스물다섯의 나이에 정말 대단하셨습니다.” 간비오산 봉수대를 돌아보며 ‘격황소서’의 전말을 들은 만호 룡수의 경탄에도 치원은 정색을 거두지 않았다.

“내부의 반란이든 외적의 침입이든 난과 전쟁은 언제나 무고한 백성의 삶을 도탄에 빠지게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무릇 나라는 백성의 안전을 책임지고 삶을 보살피는 것이 전부라 할 수 있으니 그 관리된 자는 외적의 방비를 첫 번째 과업으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

봉수대를 등에 두고 내려다보니 수영강 하구의 수군기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적의 침입이 있으면 그 수군기지의 신호로 봉수대에 불을 지펴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동래의 황령산과 기장의 남산봉수대로 전파되게 하니 곧바로 대비하고 필요하면 군사의 지원도 받을 수 있었다.

“해운포와 수영만 일대는 나라 동남쪽 최일선의 초소로서 그 임무가 참으로 막중합니다.”

   
해운동백차
“나라의 일이 아니어도 우리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한시도 소홀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하며 만호가 손짓하자 막사 앞에서 물을 끓이던 딸이 쟁반을 받쳐 들고 다가온다.

“지대가 높으니 바람이 매우 쌀쌀합니다. 따뜻한 차를 준비했으니 몸을 좀 녹이시지요.”

편편한 바위 위에 목반(木盤)을 내려놓은 만호의 딸은 보랏빛 작은 주머니에서 짙은 주황색이 도는 마른 꽃 한 송이를 꺼내 자기찻잔에 넣고 찻주전자의 물을 따랐다. 물 기운이 번지자 마른 꽃은 서서히 생기를 머금으며 꽃잎을 펼치는데 붉은 꽃잎 위의 노란 꽃술까지 되살아나는 듯하다.

“무슨 차요?” 치원의 물음에 그동안 말이 없던 딸이 처음으로 입술을 뗐다. “동백꽃 차입니다.” 낭랑하고 맑은 음성이고 담담한 어조다.

“동백꽃으로도 차를 만드시오?”

이번에도 여전히 눈길은 목반에 둔 채 딸이 대답을 잇는다. “꽃이 향기를 내는 것은 벌을 불러 수정하기 위함인데 겨울에는 벌이 없으니 동백은 화려한 색으로 새를 부릅니다. 주로 동박새가 날아들어 꿀을 먹으며 꽃가루를 묻혀 다른 꽃에 수정하는데 꽃봉오리를 따 아홉 번 찌고 아홉 번을 말려 만듭니다.”

한 모금 차 맛을 본 치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단맛보다는 오히려 구수한 맛이 몸을 녹여주는구려.”

딸은 안도의 웃음기를 띠며 대답한다. “피를 맑게 하여 혈액순환을 돕고 이뇨에도 좋다고 합니다.”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감았던 치원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눈을 뜬다. “해운동백이라, 끝모를 바다의 넉넉함과 흰 구름의 고결함을 푸르고 붉은 청년의 기운으로 품은 차이니 ‘해운동백(海雲冬柏)’이라 이름 짓는 게 좋을 듯합니다.”

“하하, 선생 덕분에 그저 동백꽃차가 마침내 이름을 얻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만호의 너털웃음에 딸도 빙그레 웃음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김정현·소설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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